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다른 표기 언어 Domenico Ghirlandajo 동의어 도메니코 디 토마소 비고르디, Domenico di Tommaso Bigordi
요약 테이블
출생 1449년경, 피렌체
사망 1494년 1월 11일, 피렌체
국적 이탈리아

요약 15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파 화가로 주요 작품은 <성 히에로니무스>와 <조반나 토르나부오니의 초상화>. 금세공가의 아버지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다가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프레스코화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5세기 후반 유화가 성행할 때에도 유화를 그리지 않고 프레스코화만을 그렸으며 특히 당대 의상을 입은 유력 인사들의 초상을 많이 그렸다. 인물들의 초상화를 종교적인 주제와 결합시키는 것과 의상과 실내장식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기를란다요 그림의 주된 특징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주역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소년 시절에 기를란다요 문하에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

그는 당대 의상을 입은 유력 인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가였으며 그의 별명인 '기를란다요'는 아버지가 꽃장식을 잘 만들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아버지의 가게에서 도제 생활을 했던 듯하나 그가 어떻게 화가 수업을 받았으며 화가로서 출발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초기작품으로 추정되는 1470년대초 그림은 기를란다요가 8세쯤 되었을 때 죽은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프레스코화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전기를 쓴 조르조 바사리는 그의 책 〈삶 Le Vite〉(1550)에서 기를란다요가 피렌체 화가 알레소 발도비네티의 제자라고 밝혔지만, 발도비네티는 기를란다요보다 겨우 너댓 살 위였다.

그는 나무화판에 그리는 작은 그림들보다 커다란 벽에 그리는 프레스코화를 더 좋아했으나 프레스코화 중 주요작품으로 꼽히는 제단화들은 나무화판에 그렸다. 당시 대부분의 피렌체 화가들이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15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유화가 더욱 성행했으나 그는 전혀 유화를 그리지 않았다.

피렌체 근처 체르치나 성당에 있는 세 성자를 그린 프레스코화가 현재 기를란다요의 첫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일반적으로 1472~73년에 제작된 것이 거의 확실한 피렌체 오니산티 교회에 있는 프레스코화들이 그의 초기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꼽힌다.

그중 하나인〈피에타 Pietà〉에는 베스푸치 가족이 애도자로 그려져 있다. 여기서 이미 그 당시 의상을 입은 인물들의 초상화를 종교적인 주제와 결합시켜 그리는 기를란다요의 특성이 나타나 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또한 초기 플랑드르파가 보여준 것처럼 극도로 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쓰는 열정도 엿보인다. 오니산티 교회에 있는 또다른 프레스코화인〈성 히에로니무스 St. Jerome〉은 1480년 작품으로, 피렌체에 소개된 플랑드르화가 얀 반 에이크의 유화를 프레스코화로 확대해서 그린 것 같다.〈성 히에로니무스〉은 보티첼리가 그린〈성 아우구스투스 St. Augustine〉와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특히 중요한데, 두 작품의 차이점은 기를란다요의 작품이 보다 평범하고 일화적이라는 데 있다.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

주문제작한 최초의 대작은 1475년 피렌체 근처 산지미냐노 성당에 그린 프레스코화〈성 피나의 생애 Life of Sta. Fina〉이다.

이것은 프라토 성당에 있는 프라 필리포 리피의 조금 앞선 연작 프레스코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러 사람들을 좀 딱딱하게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여 그렸는데, 이 점은 점차 기를란다요 작품의 특징으로 굳어졌다. 이때부터 그는 벌써 조수들을 고용했으며 후기 작품들에는 잘 훈련된 조수들을 많이 동원하여 프레스코화 여러 부분을 동시에 그리게 함으로써 대규모 작업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마칠 수 있었다.

1481~82년에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시스티나 예배당에 예수가 첫 사도들을 부르는 장면을 담은 프레스코화를 제작해달라는 중요한 부탁을 받았다. 이 그림의 양식은 1427년경 마사초의 프레스코화들을 연상시키는데 마사초의 양식들은 15세기초 피렌체에서는 매우 혁신적이었으나 기를란다요 시대에는 이미 시대에 뒤진 것으로 여겨졌을 것 같다.

이 프레스코화의 중요한 특징은 로마에 살고 있던 피렌체 거류민들이 성서의 사건들에 대한 증인들로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교황청을 위해 그린 프레스코화에 피렌체 사람들을 그려 넣은 것은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피렌체 정부는 교황 식스투스 4세가 토스카나의 유력한 은행가 집안인 파치와 공모하여 피렌체 메디치가의 주요 인사들을 살해하려 했다고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를란다요는 로마에 머무를 때 로마의 오랜 유물들을 직접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뒤에 그가 그린 작품에서 개선문과 석관(石棺), 그외 고대 유물들을 세세히 묘사한 부분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고대 유물들을 그린 드로잉으로 가득 찬 스케치북(현재 마드리드 근처 엘 에스코리알 소장)은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의 것으로 보인다.

짧았던 그의 생애 후반에 기를란다요는 그의 형제인 다비데와 베네데토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중요한 두 편의 프레스코화 연작을 만들어냈다. 먼저 것은 일련의 프레스코화와 템페라 화법으로 그린 제단화인데, 피렌체에 있는 산타트리니타 성당의 사세티 예배당을 위해 1482~85년경에 그린 것으로 메디치은행 대리인 프란체스코 사세티의 수호성자인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의 일생을 담고 있다.

이 그림들에서도 또한 예를 들면 산타트리니타 성당 정면의 원래 모습들에서처럼 당대의 건물과 의상이 세부묘사에 사용되었다. 특히 그림 속에는 메디치가의 주요인물들과 함께 사세티가의 인물들도 많이 등장하며 이들은 실제보다 더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진 듯하다.

1485년에 그린 제단화는 목자들의 경배를 표현한 작품으로 로마의 개선문을 배경으로 삼고 있고 구유 대신 로마 석관이 놓여 있는 등 고대 유물에 대한 기를란다요의 높은 관심을 더욱 잘 보여 준다.

이 그림은 당대의 플랑드르 회화 특히 메디치은행의 또다른 대리인이었던 토마소 포르티나리의 의뢰를 받고 휘고 반 데르 후스가 플랑드르에서 제작하여 1470년대말 피렌체로 가져온 대형유화를 참조했다(포르티나리 제단화).

기를란다요가 마지막으로 그린 가장 위대한 연작 프레스코화는 메디치 가문의 또다른 은행가인 조반니 토르나부오니를 위해 제작한 것으로 동정녀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일생을 그린 것이었다.

1485년 9월 1일에 이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피렌체에 있는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의 성가대석 벽면에 그리기로 계약을 했으나 그는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죽었고 제자들이 1490년경에 완성했는데, 그 제자들 중에는 아마 어린 미켈란젤로도 있었던 것 같다. 이 그림은 사세티 성당에 있는 프레스코화보다도 더욱 일화적이며 귀족저택의 실내장식과 당시 의상들을 더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결과 이 작품들은 15세기 후반 피렌체 대저택에 어떤 가구들이 있었는가 알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의 프레스코화들은 세밀한 부분에 너무 신경쓴 탓에 작품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그린 비교적 작은 패널화들, 특히〈조반나 토르나부오니의 초상화 Portrait of Giovanna Tornabuoni〉(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는 그 간결성 때문에 산타마리아노벨라의 프레스코화들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

조반나 토르나부오니의 초상화(Portrait of Giovanna Tornabuoni)
조반나 토르나부오니의 초상화(Portrait of Giovanna Tornabuoni)

딸기코 노인이 손자를 데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아마 기를란다요의 가장 훌륭한 작품에 속할 것이다. 이 그림은 간결성과 단순한 처리뿐만 아니라 부드러움과 인간미를 지닌 작품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기를란다요는 메디치 가문이나 다른 유력한 후원자로부터 대작을 주문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와서 그의 작품이 지닌 뛰어난 사실성 때문에 15세기 피렌체의 으뜸가는 화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20세기 대부분 기간에 걸쳐 보티첼리나 필리피노 리피의 뛰어난 상상력 때문에 기를란다요의 그림들은 다소 따분하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196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이 지닌 정직성과 사실성은 또 다시 호평을 받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