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

다른 표기 언어 Francesco Guicciardini
요약 테이블
출생 피렌체, 1483. 3. 6
사망 1540. 5. 22., 피렌체 근처 산타마프게리타아몬티치
국적 이탈리아

요약 피렌체의 정치가·외교관·역사가.

그가 쓴 〈이탈리아사 Storia d’Italia〉는 당대의 역사를 다룬 매우 중요한 저서이다.

로렌초 데 메디치 지배 때 피렌체의 저명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498~1505년에 피렌체·페라라·파도바 등지에서 로마법을 공부했으며, 그뒤 피렌체에서 법률 실무에 종사했다.

1508년 알라만노 살비아티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자신의 가족 회고록과 1378~1509년의 〈피렌체사 Storie fiorentine〉를 쓰기 시작했다. 〈피렌체사〉는 1494년 이후의 이탈리아 공화제 연구에 중요한 사료이고 구이차르디니의 역사 분석·서술 재능을 보여주는 저서이다. 그가 1511년 피렌체 대사가 되어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에게 파견되어 있었을 때, 1494년부터 계속 망명생활을 해온 메디치 가문은 당시 스페인 군대의 압력을 받고 있던 피렌체로 돌아와 권력을 회복했다.

1514년에 피렌체로 돌아온 구이차르디니는 다시 법률실무에 종사했으며 오토 디 발리아라는 치안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1515년에는 시뇨리아(최고행정관) 정부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13년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한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1516년에 구이차르디니를 모데나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듬해에는 레조 총독까지 겸하게 했다.

그는 1534년까지 계속 교황을 위해 일했다(레조넬에밀리아).

새로 교황령이 된 이 지역들은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고 내부에서도 혼란이 있었지만 그는 그곳을 통치하는 데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이탈리아 전쟁). 엄격하고 때로는 가혹하기조차 한 그의 정책은 질서회복에는 효과적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에 대한 인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레오 교황과 동맹관계에 있던 신성 로마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레조는 교황령의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1521년 7월 구이차르디니는 교황군의 전권대리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종종 자신의 직무와 관련되는 당시의 정치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형태로 많은 비망록과 논문을 썼는데, 1521~25년에 쓴 〈피렌체 정부론 Dialogo del reggimento di Firenze〉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책에서 그는 피렌체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베네치아식의 귀족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

교황군의 전권대리로서 그는 용기와 결단력을 발휘하여 1521년 12월 파르마가 프랑스에게 함락당하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같은 달 교황 레오 10세가 죽고 하드리아노 6세가 즉위한 뒤 모데나와 레조 총독직을 박탈당했으나 1522년말 다시 복직되었다. 1523년 하드리아노 6세가 죽자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두 도시를 원래 그곳을 지배했던 페라라 공작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비록 페라라 공작과의 싸움에서 레조는 빼앗겼지만 모데나를 지킬 수 있었다.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한 뒤 구이차르디니의 공적을 인정해 그를 1524년 교황령의 최북단 도시 로마냐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파비아 전투 뒤 카를 5세의 군대가 남하하려 하던 위험한 상황에서 구이차르디니는 교황에게 많은 조언을 했으며, 1526년 1월에는 교황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로마에 갔다. 그는 카를 5세에 대항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를 주장하며 교황 자문회의에서 뛰어난 역할을 했다.

1526년 5월에 이루어진 코냐크 동맹은 어느 정도 그가 노력한 결과였으며 그해 6월 교황군의 지휘관으로 동맹군에 참여했다. 그러나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황제군이 피렌체와 로마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자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태어난 도시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클레멘스 교황의 정책 결과 피렌체가 위기에 처하자 메디치 정권에 대한 반대의 소리가 높아졌다. 우르비노 공작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 가까이에 도착하고 메디치가 그를 마중하러 도시를 떠나자(1527. 4. 26) 피렌체에 반란이 일어났다. 도시 방어를 돕기 위해 그곳에 막 도착한 구이차르디니는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반란자들의 항복을 받아내 부르봉 공작군의 공격으로부터 시(市) 행정부 건물을 보호할 수 있었다.

며칠 뒤 부르봉 공작군은 로마를 장악했고 피렌체에서는 메디치가가 축출되고 공화정부가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로마에서 클레멘스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게 되자 구이차르디니는 교황 전권대리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어렵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가 맺어왔던 메디치가와의 오랜 관계로 인해 공화제가 다시 들어선 피렌체에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피렌체에서는 강경 공화파가 승리해 교황과 타협하려 했던 니콜로 카포니 장관이 물러났으며(1529. 4), 뒤이어 황제군이 들어왔다.

이 때문에 어려움에 빠진 구이차르디니는 1529년 9월 피렌체를 떠나 교황청으로 갔다. 그뒤 메디치가를 피렌체에 다시 들어서게 하려는 교황의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피렌체 시민을 위해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고 애썼지만 1530년 3월 피렌체에서는 그를 반역자로 선고했다.

1528~30년 구이차르디니는 피렌체의 역사에 관한 2번째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해 그의 정치관과 사회관을 가장 간결하고 다채롭게 표현한 격언과 성찰(省察)의 묶음인 〈회상록 Ricordi〉을 펴냈다.

그의 정치사상은 친구인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지만 때로는 더 급진적이다. 그는 오랫동안 교황을 위해 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교회를 비판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논의'에 관한 고찰 Considerazioni intorno ai 'Discorse' del Machiavelli〉에서 로마역사를 과학적인 정치의 한 전형으로 본 마키아벨리의 의견에는 반대했다.

구이차르니나는 피렌체에서 공화정부가 무너진 뒤 교황 대표자격으로 돌아와 공화당원 추방에 앞장섰다. 1531년 클레멘스 교황은 그를 볼로냐 총독에 임명했으나 1534년 바오로 3세가 즉위하면서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공작의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신이 교황의 참모로 있었던 시기의 이탈리아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뒤 몇 년 동안 수정을 거친 이 책은 1494~1534년 사이의 이탈리아 역사를 다룬 그의 더 큰 야심작 〈이탈리아사〉의 줄기를 이루었다. 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1536년으로 추측되는데 죽을 때까지 계속 수정했다. 그는 책에 기술한 많은 사건들과 직접 관련이 있었던 정치가였고 사료를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 앞선 인문주의자들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그들을 능가한 역사가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사〉는 격동과 침략의 시기인 16세기초 근대 이탈리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책이 되고 있다.

1537년 알레산드로가 살해당한 뒤 구이차르디니는 코시모 공작이 그 뒤를 이을 수 있도록 도왔는데, 아마도 공작의 권력이 지나치다고 생각해 이것을 제한시키고자 하는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새 통치자 아래서도 여전히 고위직책을 맡기는 했으나 자신의 희망과 개인적 야망이 만족되지 않자 말년에는 산타마가리타아몬티치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자신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사〉의 완성에 몰두했다.

구이차르디니 동상
구이차르디니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