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쿠 슈스이

고토쿠 슈스이

다른 표기 언어 Kotoku Shosui , 幸德秋水 동의어 고토쿠 덴지로, 幸徳傳次郎
요약 테이블
출생 1871. 11. 4, 일본 고치 현[高知縣] 나카무라[中村]
사망 1911. 1. 24, 도쿄
국적 일본

요약 일본의 사회주의 지도자.

급진적인 정치활동을 주창하였으며 그가 처형당하자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일시적으로 둔화되었다.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10대 중반부터 자유민권운동(自由民權運動)에 관심을 가진 그는 이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의 집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1893년에 나카에의 소개로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주재하는 〈지유신문 自由新聞〉의 기자가 되었으나 곧 퇴사한 뒤 좀더 진보적인 만조보〈萬朝報〉 기자로 입사하여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와 알게 되었다.

고토쿠는 청일전쟁(1894~95) 이후 급속히 발전한 일본 자본주의의 각종 사회 문제를 접하면서 차츰 사회주의 사상을 품게 되었다. 1897년에는 사회문제연구회에 가입했고 가타야마 센[片山潛]의 권유로 사회주의 연구회에 입회했다. 사회주의연구회는 1900년에 실천적 성격을 강화한 사회주의협회로 개편되었고 마침내 이듬해에는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1905년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저작을 보고 무정부주의와 생디칼리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출옥 후 요양차 건너간 미국에서 급진적 노동운동 단체인 세계산업노동조합(IWW)의 지도자들과 접하면서 아나코 생디칼리슴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귀국한 뒤부터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가타야마 등의 의회정책주의를 비판하고 급진적인 직접행동론을 제기함으로써 운동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급진파에 의해 계획되고 있던 덴노 암살계획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1910년에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대역사건이다(→ 대역사건). 이 사건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당국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의도적으로 확대해석되었으며, 결국 고토쿠 등 12명이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이후 10년 가까이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그의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평가가 결여되어 있고 지사적(志士的) 엘리트 의식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특징은 다이쇼기[大正期]에 오스키 사카에[大杉榮]로 계승된다. 저작으로는 〈20세기의 괴물제국주의〉(1901)·〈사회주의신수 社會主義神髓〉(1903) 등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