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집

결집

다른 표기 언어 Samgiti , 結集

요약 역사적으로는, 붓다 사후에 경전의 내용을 함께 암송하여 공인하고 교의적 논란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소집된 모임.
'합송'(合誦)이라고도 함.

결집의 역사적 사실성 여부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불교 내의 각 전승이 전하고 있는 결집의 내용도 서로 상당히 다르다. 대체로 확실한 것은 이러한 결집으로 인하여 불교 공동체 내에 분파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이다.

최초의 결집은 붓다 사후 첫번째 우기(雨期)에 라자그리하(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 라지기르)에서 개최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붓다가 제정한 승가 규칙을 담은 율장(律藏)의 편집은 우팔리 장로의 책임하에 이루어졌고, 교훈적 경구들을 모은 경장(經藏)의 편집은 아난다 책임하에 이루어졌다(→ 아난다). 그런 후 정신적 수련의 최종 단계에 이른 500명의 아라한이 함께 승인된 내용을 암송하였다.

2번째 결집은 바이샬리 승려들이 따르던 계율이 느슨하다는 논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붓다 사후 100년경에 바이샬리(비하르 주)에서 소집되었다.

스리랑카의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 전승에 따르면, 이 회의에 모인 승려들은 바이샬리 승려들의 느슨한 관행을 지지하는 이들과 그것에 반대하는 이들로 갈라졌다고 한다. 이 회의에서 다수가 바이샬리 계율에 반대하였으므로 뜻을 관철하지 못한 소수의 승려들은 분리하여 새로이 대중부(Mahāsāṁghika)라는 부파를 형성하였다(→ 대중부).

당시 논란의 대상이 된 관행의 10개 조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다른 설이 있지만, 대체로 소금의 저장, 규정된 시간 외에 식사를 하거나 탁발을 하는 것, 스승의 행위를 선례로 삼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 금과 은을 보시로 받는 것 등과 같은 문제를 다루었다.

또한 이 분열에는 아라한 특성에 대한 교의적 차이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중부 시조(始祖)로 일컬어지는 마하데바는 아라한에게도 아직 무지와 의혹이 남아 있다는 등 아라한의 깨달음을 낮추어 보는 5가지 주장을 내세웠다고 한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 결집에 대한 상좌부 계통의 설명이 옳지 않을 수 있으며 불교 내의 각 부파 사이에는 서로 다소 다른 설명이 전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3번째 결집은 BC 247년경, 즉 아소카 왕 재위 기간중에 그의 왕국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지금의 파트나)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결집은 상좌부 계통 회중에 한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무렵 불교 교단은 수행 규율에 대한 다른 해석을 주장하며 2개 부파로 갈라진 근본분열에 이어, 이로부터 다시 여러 지파(支派)가 갈라져 나오는 지말(枝末) 분열이 진행되어 있었다. 이때문에 각 부파 승려들로서는 모두 함께 모여 집행하는 보름마다의 포살(布薩) 의례를 개최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포살). 여기서는 승려들이 어떤 규율을 위반하였는지에 대해 먼저 참회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곤란함이 제3결집을 촉발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모임에서는 스스로 분별론자(分別論者 vibhajyavādin)임을 자처하지 않는 승려들은 추방되었다. 팔리어 논장에 소속된 〈논사 論事 Kathāvatthu〉에는 제3결집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견해들에 대해 검토하고 논파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상은 상좌부측의 전승에 입각한 것이며 불교에서 부파분열의 과정과 양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설(異說)을 전하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제3결집이 아소카 이후 BC 2세기말까지의 기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교의 유력한 부파 가운데 하나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의 연대기에서는 아소카 왕 때의 이러한 결집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3번째 결집이라고 말하는 것은 카니슈카 왕 치세중에 잘란다라(다른 전승에 따르면 카슈미르)에서 열렸는데, 상좌부에서는 이것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카니슈카 왕의 연대가 확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결집이 언제 있었는가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AD 100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결집에서는 저명한 학자인 세우(世友 Vasumitra)가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한 전승에 따르면 그의 지도하에 경전들에 대한 주석서가 저술되었고 그 사본들이 여러 개의 탑에 안치되었다.

상좌부를 계승한 남방불교 전통에서는 파탈리푸트라에서의 제3차 결집까지만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한다.

그래서 한참 후대에 제4차 결집을 스리랑카, 제5차와 제6차 결집을 버마에서 개최한 바 있다. 현대에 와서 유명한 것은 6번째 결집이다. 이 결집은 상좌부 연대기에 따라 고타마 붓다 서거 2,5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하여 1954년 5월~1956년 5월 양곤에서 열렸다. 인도·스리랑카·네팔·캄보디아·타이·라오스·파키스탄 등지로부터 온 승려들은 이때 상좌부 팔리어 경전 전체원문을 검토하고 암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