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지

게이지

다른 표기 언어 Thomas Gage
요약 테이블
출생 1721, 잉글랜드 서식스 펄
사망 1787. 4. 2, 잉글랜드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장군.

북아메리카에서 10년 이상(1763~74) 영국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미국독립혁명이 일어났을 때 매사추세츠 총독으로 있으면서(1774~75) 혁명의 물결을 막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프렌치-인디언 전쟁(1756~63)을 수행하기 위해 1754년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배를 타고 북아메리카로 건너감으로써 북아메리카에서의 군경력이 시작되었다.

그는 서부 펜실베이니아에서 에드워드 브래덕 장군이 크게 패했던 전투(1754), 그리고 퀘벡과 싸워 승리한 전투(1759~60)에 참가했다. 그후 몬트리올의 총독이 되었으며(1760) 육군소장으로 승진했다(1761).

1763년 그는 식민지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있는 자리인 북아메리카 영국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뉴욕에 본부를 두고 뉴펀들랜드에서 플로리다까지, 버뮤다에서 미시시피까지 이르는 지역에 50개 이상의 요새와 주둔지를 둔 방대한 군사기구를 운영하면서 외교·무역·통신, 인디언과의 관계, 서부 경계지역의 문제 등을 다루는 데 인내와 재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 싹트고 있던 독립운동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커다란 실수를 했다.

그는 영국의 중요한 상임고문으로 있으면서 식민지에 대해 비판적이고 냉담한 보고서들을 본국에 보내 영국 총리들이 잇달아 바뀌어도 모두 식민지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도록 했다.

본국에 대한 저항이 보스턴 차 사건(1773)으로 이어지면서 폭력적으로 확산되자, 그는 영국 의회가 식민지인들에 대해 보복하는 조치를 내용으로 한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1774)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중에는 훼손된 차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또한 '참을 수 없는 법'에는 군대가 민박할 수 있도록 하여 식민지인들의 분노를 촉발케 한 조항과 식민지의 민주기구들을 영국의 군사정부로 대체시키는 '매사추세츠 정부법'이 포함되었는데 그것도 그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1774~75년 매사추세츠 총독으로 있으면서 영국의 대의를 옹호한 사람으로 미국에서는 기억되고 있다.

그는 총독으로 있으면서 탄약저장소를 찾아내고 혁명 선동의 주요인물인 새뮤얼 애덤스를 체포하기 위해 영국군에게 렉싱턴과 콩코드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775. 4). 이 불행한 작전이 미국독립혁명의 신호가 되었다.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에서 실패하고 이어 6월 벙커힐 전투에서도 패하자 그는 총독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윌리엄 하우 경이 그의 뒤를 이었다. 곧 영국으로 돌아간 그는 1782년에 육군대장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