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보성선원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대구 보성선원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 Wooden Seated Sakyamuni Buddha Triad and Excavated Relics of Boseongseonwon Temple, Daegu , 大邱 寶聖禪院 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및 腹藏遺物 ]

요약 대구광역시 보성선원에 있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목조불상 3점과 복장유물 10건 129점. 2013년 4월 29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구 보성선원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대구 보성선원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

지정종목 보물
지정일 2013년 4월 29일
소장 (재)선학원 보성선원
소재지 대구광역시 달서구 송현로8안길 35 (송현동, (재)선학원 보성선원)
시대 조선
종류/분류 유물 / 불교조각 / 목조 / 불상
크기 석가불(본존) 높이 139.2㎝, 문수보살(우) 높이 136.5㎝, 보현보살(좌) 높이 133.3㎝

대구시 보성선원 대웅전에 있는 삼존상과 복장유물로 발원문에 따르면 본래 경상남도 거창 우두산 견암사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견암사가 폐사되기 전에 이미 보성선원에 이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상의 가운데에는 석가여래좌상이 있고 본존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문수보살좌상, 왼쪽에 보현보살좌상이 배치되어 있다. 복장유물이 원형 그대로 발견되어 1647년이라는 제작연대를 비롯한 삼존상의 조성 내력을 알 수 있다. 

양식적 특징

본 보성선원 상들은 상반신이 길고 어깨가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 비례를 보여준다. 각각의 두발 표현과 머리 장식을 제외하면 삼존의 얼굴이나 신체의 묘사가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석가여래상은 고개를 숙여 시선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가부좌로 앉아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무릎에 얹은 채 손가락을 아래로 떨어뜨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다. 얼굴은 사각으로 하관이 넓은 얼굴에 넓은 이마, 좌우가 긴 눈, 가늘고 얇은 입술과 짧은 턱이 특징적이다. 신체는 상체가 하체에 비해 높고 건장한 편이다. 복장은 어깨에 대의를 걸치고 오른팔을 드러냈으며 밋밋한 가슴 아래에 연판(蓮板) 모양의 의복을 표현하였다.

문수보살좌상은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봉안된 것이다. 좌우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수인의 방향을 제외하면 서로를 구분하기 어려우리만치 유사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두 상은 신체 비례와 얼굴 표현이 매우 비슷하며 머리에 공통으로 봉황, 구름, 꽃, 화염보주로 장식된 보관(寶冠)을 썼다.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肉髮)가 표현되었고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두 상의 손은 위치만 서로 반대인데 양 손을 모두 무릎 가까이에 두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모습이다. 이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착의법은 편삼 위에 대의를 양 어깨에 걸쳐 변형 통견 형식을 보여준다. 사실상 이 상이 문수보살인지는 명확하게 단정할 만한 지물이나 보관의 도상적 특징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왼손의 시무외인으로 보아 석가불상의 왼쪽 협시보살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문수보살로 비정할 수 있다.

본존상 왼쪽에 봉안된 보현보살좌상은 화려한 보관, 사각형 얼굴, 어깨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등의 표현이 문수보살과 일치한다. 다만 좌우를 바꾼 수인의 팔목에 팔찌가 없는 점, 오른쪽 어깨에 걸친 옷 주름이 세 가닥으로 접힌 점 등의 차이가 있다.

복장유물

삼존상의 내부에서는 발원문(發願文)을 비롯하여 후령통, 오방경, 오보병 등이 들어 있었다. 먼저 석가불에서 나온 것은 후령통, 오보병, 불교 전적이다. 후령통은 높이 8.5㎝의 유기합으로 뚜껑과 합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방경은 거울로 둘러싼 합이다. 오보병은 길이 7㎝ 가량 되는 청색, 황색, 홍색, 녹색, 백색 병 5개로 구성되어 있다. 경전은 30여점 나왔다.

문수보살 복장물은 후령통과 경전 20여점이 나왔다. 보현보살에서는 오보경과 경전 20여점이 나왔다. 삼존상에서 나온 불교 전적은 총 100여점에 가까운데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불조삼경(佛祖三經)》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1620년대에 편찬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삼존상의 조성 이래 복장물에는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발원문에는 이 삼존상이 1647년 조각승 현욱(玄旭)의 주도로 제작되었음이 기록되었다. 아울러 상의 제작시기, 시주자 명단, 조각승의 명단이 있다. 시주자 명단을 보면 불상(佛像), 주불(主佛), 좌보처(左補處), 우보처(右補處), 면금(面金), 황금(黃金), 오금(烏金), 포(布), 공양(供養), 복장(腹藏) 등 각 시주 물목마다 시주자의 이름이 부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시주자의 경제력에 따라 시주 내용이 달랐음을 추정할 수 있다.

조각승

이 삼존상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인 청허(靑虛, 또는 淸憲)의 계보를 잇는 현욱(玄旭)이 수(首) 조각승으로 제작한 첫 작품이다. 발원문에 따르면 이밖에 조각승 나흠(懶欽)과 현감(玄鑑)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청허 계보 안에서 나흠이 수조각승으로 활동한 사례는 보고된 바 있지만 현욱의 경우 이 작품이 유일하다. 이를 통하여 청허 유파의 조각이 시기별로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현욱의 조각은 천진한 얼굴에 당당한 신체 비례를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본 삼존상은 얼굴 묘사에서 턱이 짧고 살이 많은 특징을 보인다. 이는 청허 외에도 현욱이 현진(玄眞)과 수연(守衍)의 영향을 일부 수용하였음을 보여준다. 현욱은 본 유물 외에 1644년 경산 경흥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1645년 상주 남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현욱과 함께 본 삼존상의 조성을 맡았던 나흠은 이듬해인 1648년에 양산 원효암 석조약사여래좌상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현욱과 나흠 등 본 삼존상의 조각승들은 청허 아래에서 훈련을 받아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하며 하나의 계파를 형성하며 조각 양식을 이어갔다.

가치와 의의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등의 복장물이 조성 당시의 원형을 갖추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특히 발원문에는 1647년이라는 정확한 조성 시기를 비롯하여 봉안 사찰, 조성 주체, 시주자, 제작자를 알 수 있는 정보가 있어 17세기 불상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현욱, 나흠, 현감 등 경상도에서 활약한 청허의 제자들의 활동상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아울러 현재로서는 현욱이 수조각승으로 주도한 첫 작품이자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목조불상 3점과 복장유물 10건 129점은 2013년 4월 29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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