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醫師)들의 독립운동기

의사(醫師)들의 독립운동기

주제 인문, 사회
칼럼 분류 인물기사
칼럼 작성일 201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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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연세대학교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 의학교에서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가 7명 탄생했다. 이 중 대부분은 의사의 직업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김필순(金弼淳, 1878~1919)이다. 김필순은 1878년 6월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고, 독립운동가인 김규식의 매제이자 김마리아의 삼촌이다.

■ 북쪽의 제중원 ‘북제진료소’의 김필순
김필순은 제중원 의학교 재학 중에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에서 구국운동을 펼쳤고, 이후 세브란스 병원에 재직하면서는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제공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안창호(安昌浩, 1878~1938)와는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으며 1907년에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해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적극 동참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합병 후 김필순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위한 기반 마련에 적극 참여했다. 지금 중국 길림성의 동남부 지역, 당시에는 간도 지방에 한국인 마을을 만들고, 그곳을 기반으로 해 독립군을 양성한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간섭은 끊이지 않았고, 김필순은 다시 치치하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김필순은 북쪽에 있는 제중원을 뜻하는 의미로 ‘북제진료소(北濟診療所)’를 개원했다.

당시 의사는 공개적으로 치료받기 힘든 독립운동가의 몸을 돌봐 주었다. 또 병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중요한 연락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김필순은 병원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수익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1919년에 드디어 조국에서 3 · 1운동이 일어났지만, 김필순은 그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같은 해 일본인 의사에 의해 독살되고 말았다.

김필순뿐만 아니라 제중원 의학교의 동기 중 신창희, 주현칙, 박서양, 김희영 등도 의사면허를 갖고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이들의 활동 덕분에 이후 많은 의사들이 독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됐다.

■ ‘독립신문’ 발행인, 서재필
김필순과 같이 독립운동가로 알려졌지만, 미국에 가서 한국인 최초로 서양의사가 된 사람이 있다. 바로 서재필이다. ‘독립신문’의 발행인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통 서재필하면 독립운동가나 ‘독립신문’ 발행인을 가장 먼저 떠 올리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망명을 갔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는 영어에 능통하지 못했고,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막노동과 식당 아르바이트, 인쇄소, 농장 등에서 일을 했다. 한국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밖에 없었고, 생활이 낯설었기 때문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 덕분에 거처를 구할 수 있었고,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이 좋게도,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후원자를 만났다. 홀렌벡은 펜실베이니아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였고, 자선 사업가였다. 그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게 도와주었다. 서재필은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이라는 명문고에 입학했으며, 라틴어나 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냈다. 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을 하기도 했다.

■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 서재필
188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워싱턴의 콜롬비아 대학의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 야간반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1년간 공부를 마치고 후원자인 홀렌벡과도 결별을 하게 됐다. 일자리를 찾아 떠난 워싱턴의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서재필은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학서적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서재필은 의학서적을 번역하면서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현재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인 컬럼비안 대학(Columbian University) 의과대학 야간학부에 입학했다.

서재필, 콜롬비아 대학교 졸업 앨범-맨 윗줄 왼쪽에서 세 번째

서재필, 콜롬비아 대학교 졸업 앨범-맨 윗줄 왼쪽에서 세 번째

당시 유태인이나 유색 인종은 의대에 입학할 수 없던 사정과는 매우 이례적으로 서재필은 컬럼비안 대학교의 본과로 진학하게 됐다. 마침내 그는 1893년 대학교를 졸업했고,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 의학학사가 됐다. 재학 중에는 가필드 병원에서 1년 간 수련의 인턴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모교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조교가 됐지만, 유색인종에게서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학생들의 반발이 심해 1년 만에 그만두었다.

서재필은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으로 귀화했다. 그는 미국으로 귀화한 최초의 한국인이기도 하다.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생활로 근대적인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에 대해 더욱 강하게 확신했다. 당시 조선은 여전히 외부 열강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후진적인 사회로 정체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조선과 미국에서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면서, 생계가 매우 힘들어졌다. 펜실베이니아 주 대학병원에서 연구 생활을 하면서 생계를 겨우 유지했으나, 격심한 생활난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암 치료 전문 병원인 잔느 병원에 고용의사로 취직했고, 병리학 전문의 면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폴리크리닉 병원이나 제임스 병원으로 옮겨 다니며, 고용 의사로 생활했다. 병리학 의사로 여러 병원에 근무하면서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이어나갔다.

현재의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은 미국 유학 중에 서재필을 찾아갔다. 유일한은 서재필에게 일제하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고생하는 우리 민족을 위해 건강한 나라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피력했다. 그런 유일한에게 서재필은 손수 조각한 목각화 한 장을 내 주었다. 그것은 잎사귀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버드나무였다. 이것은 ‘끈질기고, 무성하게 대성하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이 그림은 유한양행의 마크로 사용하기도 했다.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이자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김필순과 서재필. 자신의 의술이 조국 독립에 보탬이 되길 희망했던 그들의 뜻을 되새겨보자.

  • 심우 -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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