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매화타령
[ 江陵梅花打令 ]
정의 및 이칭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은 강릉부사의 책방 골생원이 일등 명기 매화의 미색에 현혹되어 망신을 당했다는 내용의 실전판소리 작품이다. 〈매화골로가(梅花骨老歌)〉, 〈골생원매화기타령(骨生員梅花妓打令)〉, 〈강릉매화전(江陵梅花傳)〉, 〈매화타령(梅花打令)〉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매화가(梅花歌)라〉와 〈골생원젼이라〉가 이본으로 보고된 바 있다.
유래 및 역사
〈강릉매화타령〉의 근원설화로는 서거정(徐居正, 1420-1492)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전하는 〈박신일화(朴信逸話)〉, 『기문(奇聞)』의 〈혹기위귀(惑妓爲鬼)〉, 이혜구(李惠求)가 보고한 〈강릉홍장설화〉 등이 있다. 우선 〈박신일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말 선초의 무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박신이 강원도에 부임하여 강릉 기생 홍장(紅粧)과 사랑에 빠졌다. 임기가 끝나 돌아가게 되었는데, 부윤(府尹) 조운흘(趙云仡)이 박신에게 홍장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박신이 크게 슬퍼하자 조운흘이 박신을 경포대 뱃놀이에 불렀다. 조운흘은 박신에게 옛날 신선이 놀던 이야기를 하며, 몰래 화선(畵船)을 따로 띄워 홍장을 태운 다음, 박신과 마주치게 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홍장을 보고 놀란 박신은 그녀를 가리키며 신선이라고 했다. 그러다 다시 보니 홍장이었고, 이에 모두 손뼉을 치면서 웃고 놀다가 헤어졌다. 관리와 기생 사이의 애정담, 그리고 산 사람을 죽었다고 속인 다음 놀려 주는 풍류담이 주축을 이루는 〈박신일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 『해동잡록』, 『대동기문』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정철의 〈관동별곡〉에서도 경포대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이른바 '홍장고사'를 언급한 바 있다.
『기문(奇聞)』의 〈혹기위귀(惑妓爲鬼)〉의 내용은 이러하다. 형제처럼 지내는 두 선비가 있었는데, 한 선비는 색(色)을 멀리 했고, 다른 선비는 색을 즐겼다. 후에 호색(好色)한 선비가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제수받고, 친구인 선비를 데리고 가서 잔치를 베풀었다. 기생을 부르자 그 선비는 근엄한 체 기생을 멀리했다. 이에 부사가 기생과 모의해, 기생으로 하여금 친구인 선비를 유혹하게 했다. 선비는 기생을 사랑하게 되었고, 기생이 죽었다는 거짓말에 속아 가짜 무덤까지 찾아가서 슬퍼했다. 밤에 기생이 나타나 자신이 귀신이 되었다고 말하고, 선비는 이에 속아 그녀와 동침했다. 선비는 그의 몸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보인다는 가짜 귀신, 즉 기생의 말에 넘어가 동헌 잔치에서 알몸으로 춤을 췄다. 그곳에서 부사의 부채로 얻어맞은 선비는 그제야 자신이 속은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으로 이혜구(李惠求)가 보고한 〈강릉홍장설화〉의 줄거리이다. 어느 날 강릉부사가 서울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상처(喪妻)한 후 재혼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들의 마음을 돌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부사는 강릉에 도착한 친구의 아들을 별당에 머물게 한 뒤, 기생 한 명을 일반 여인으로 변장시켜 그를 유혹하도록 했다. 하인은 그에게 여인이 죽었다고 거짓을 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이 알몸으로 나타났다. 여인은 그에게 함께 저승으로 가려면 옷을 벗어야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말 여인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는 알몸으로 강릉 장터를 구경하고, 부사의 생일잔치에 가서 음식을 집어 먹었다. 이때 그의 손을 잡으며 "아직도 네 마음이 굳으냐?"라고 묻는 부사의 말소리를 듣고서야 남자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광정(李光庭)의 『망양록』 제17화 〈질욕(窒慾)〉, 『청구야담(靑邱野談)』 소재의 〈경포호순상인선록(鏡蒲湖巡相認仙綠)〉, 최영년(崔永年)의 『실사총담(實事叢譚)』 소재의 〈풍류진중일어사(風流陣中一御使)〉, 충남 아산에서 채록된 〈여자에게 빠져 벗고 다닌 사람〉 등도 〈강릉매화타령〉의 형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나, 더 직접적인 영향을 준 설화는 〈혹기위귀(惑妓爲鬼)〉와 〈강릉홍장설화〉일 것으로 보인다.
〈강릉매화타령〉과 관련해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낙하생고(洛下生稿)』(1821)에 수록된 이학규(李學逵, 1770-1835)의 시 "비 내린 서릉에 사람의 발자취 어지러운데(過雨西陵履跡多), 보리밭 두둑 밟아 앞 언덕에 이르니(麥畦平踏到前坡), 곽씨네 문 밖에는 시장처럼 사람들이 모여들고(郭家門外(會)人如市), 노인들이 매화골로가를 즐겨 듣네(老(去)聽梅花骨老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매화골로가(梅花骨老歌)〉라는 작품명을 언급하며, "이 시기 창우들의 가곡에 골생원 매화기타령이 있었다(時世倡優歌曲 有骨生員梅花妓打令)"라는 부기(附記)를 남겼다. 이학규의 시와 부기를 통해 19세기 초에 〈강릉매화타령〉이 판소리 창자들에 의해 널리 가창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릉매화타령〉에 대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밝힌 문헌은 송만재(宋晩載, 1783-1851)의 〈관우희(觀優戱)〉(1843)로, 여기에 〈강릉매화타령〉에 대한 관극시가 삽입되어 있다. 이 시는 다음과 같다. "매화와 이별한 후 눈물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一別梅花尙淚痕), 되돌아오니 매화의 외로운 무덤 뿐일세(歸來蘇小只孤墳). 사랑에 미쳐 분별 없는 사람 되어(癡情轉墮迷人圈), 황혼에 매화의 넋이 되살아 온 줄로 믿었다네(錯認黃昏返情魂)." 송만재의 관극시로부터, 매화라는 기생이 거짓으로 죽은 체 하여 무덤까지 만들고, 가짜 귀신이 되어 주인공을 속였던 〈강릉매화타령〉의 줄거리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의 『송남잡지(松南雜識)』(1855)에서도 〈강릉매화타령〉을 언급했으나, "매화타령은 곧 배비장 이야기이다(梅花打詠 卽裵裨將事)"라는 기록이 전부이다. 〈강릉매화타령〉을 〈매화타령〉이라고도 불렀으며, 19세기 중반 당시 〈강릉매화타령〉과 〈배비장전〉이 성격적으로 유사한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재효(申在孝, 1812-1884)도 단가 〈오섬가(烏蟾歌)〉에서 〈강릉매화타령〉의 결말 부분을 소개하면서, 이와 관련해 과도한 탐색(貪色)을 경계하라는 교훈적인 주제를 제시한 바 있다.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또 한 가지 웃을 일이 강릉책방 골생원을 매화가 속이랴고 백주(白晝)에 산 사람을 거짓되이 죽었다고 훨씬 벗겨 앞세우고 상여 뒤를 따라가며, 이 사람도 건드리고 저 사람도 건드리며, 자지에 방울 차고 달랑달랑 노는 것이 그도 또한 굿일레라." 매화에게 속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골생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신재효는 이어서 "세상의 음양정욕(陰陽情慾) 여천지무궁(如天地無窮)이라, 금할 수는 없거니와 이 사랑 이 설움을 억제하자 할 양이면 부동심(不動心)이 제일이라. 이 사설 지은 것이 비유한 말이로다"라는 경계의 말을 남겼다.
정현석도 『교방가요(敎坊歌謠)』(1872)에서 〈강릉매화타령〉의 작품명과 주제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매화타령은 기생에게 빠져 몸가짐을 잃은 것이니, 이는 음란함을 징계한 것이다(梅花打令 惑妓忘軀 此懲淫也)." 여색에 대한 경계를 주제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신재효의 〈오섬가〉 중 〈강릉매화타령〉 부분과 그 취지가 통한다.
이학규의 시에서부터 정현석의 『교방가요』에 이르기까지, 〈강릉매화타령〉에 대해서는 대개 작품명과 간단한 내용, 주제를 언급하는 정도였다. 이학규의 시와 〈관우희〉의 관극시를 통해 〈강릉매화타령〉이 당시 실제 소리로 불렸던 정황을 확인할 수 있으나, 그 이후의 전승을 확인할 만한 근거는 아직 발견된 바 없다. 정노식(鄭魯湜, 1891-1965)의 『조선창극사』에 〈강릉매화타령〉이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로 이름을 올리기는 했으나, 역시 구체적인 연행 상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신재효도 단가 〈오섬가〉에서 〈강릉매화타령〉의 줄거리 일부만 언급했을 뿐, 본격적인 사설 정리의 대상으로는 삼지 않았다. 물론 이 부분은 〈강릉매화타령〉이라는 작품의 가치 및 수준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겠지만, 실전이 비교적 빨라 대중들의 관심에서 일찍 멀어졌던 정황도 작용했을 것이다. 〈강릉매화타령〉의 사설 정착본으로 1993년에 김헌선에 의해 학계에 보고된 〈매화가(梅花歌)라〉, 2002년에 김석배에 의해 보고된 〈골원젼이라〉 2종이 존재하며, 유사한 내용의 소설본으로 1803년에 목태림(睦台林)이 지은 〈종옥전(鍾玉傳)〉과 작자·연대 미상의 〈오유란전(烏有蘭傳)〉이 있다.
판소리 〈강릉매화타령〉이 전승에서 탈락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양반 남성을 훼절시키는 내용을 담은 유사한 내용의 작품이 다수 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매화타령은 곧 배비장 이야기이다(梅花打詠 卽裵裨將事)"라는 조재삼의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판소리 〈배비장전〉을 포함해 이른바 '배비장전류'의 설화와 소설도 널리 향유되고 있었다. 둘째, 양반적 질서를 부정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판소리에서 양반층 청중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던 시기이다. 〈강릉매화타령〉도 이러한 성격상 19세기 중반 이후에 자연스럽게 실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지나치게 골계미 일변도로 흐른 작품이었다. 골계미에만 치우쳐 비장미 등 다른 미학적 특질과 고른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것도 실전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내용 및 특성
〈강릉매화타령〉의 구체적인 줄거리는 최근 발견된 〈매화가라〉와 〈골생원전이라〉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강릉부사 도임시에 책방으로 따라 내려온 골생원이 강릉의 명기(名妓) 매화(梅花)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골생원이 매화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서울 본댁에서 상경해 과거를 보라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이에 골생원은 매화에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올라왔지만, 과거 시험 답안지에 매화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시를 써내고 낙방했다. 그는 매화에게 정표를 사주기 위해 시장에 갔다가 물건을 사지 않는다 하여 아이에게 봉변을 당하고, 칠푼의 돈으로 바느질 연장을 겨우 사서 내려왔다. 그런데 골생원은 강릉에 내려와 매화가 이미 죽었다는 엄청난 소식을 듣게 됐다. 물론 사실은 강릉부사가 골생원을 속이기 위해 매화를 감추고, 거짓 무덤을 만들어 둔 것이었다. 골생원이 매화의 무덤에 가서 축문을 읽고 통곡하자, 방자는 부모의 죽음이라도 당한 것이냐며 그를 놀렸다. 그러나 골생원은 굴하지 않고 환쟁이를 불러다 매화의 모습을 초상화로 그리게 한 다음, 그 그림을 껴안고 지냈다. 황혼 무렵, 매화가 부사의 지시대로 귀신이 된 체하고 골생원을 만나서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다음날 매화는 골생원을 속여 알몸으로 만든 후, 경포대에서 함께 귀신 행세를 했다. 이때 부사는 사람들을 시켜 골생원의 상여를 내보내고, 상여소리를 하도록 했다. 이에 골생원은 자신이 정말로 귀신이 되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부사가 골생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음식을 진설하고 풍악을 울리자, 골생원은 매화와 함께 나와 그 음식을 먹고 춤까지 췄다. 부사가 나타나 골생원의 몸을 담배불로 지지니, 골생원은 그제야 자신이 속은 사실을 알게 됐다.
〈강릉매화타령〉의 주요 등장인물은 골생원, 매화, 강릉부사라 할 수 있다. 골생원은 강릉 부사를 따라 책방으로 내려온 인물로, '난장이, 곱사등이, 외짝볼기, 안짱다리'의 볼품없는 외모를 지녔지만 재주는 비상하다. 골생원의 성인 '골(骨)'은 여색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색골(色骨)'의 골(骨)을 의미하는데, 이름인 '불견'과 '골'이라는 성을 합하면 '같잖고 우스워서 차마 볼 수 없다'는 뜻의 '꼴불견'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된다. 사대부의 후예이나 매화에게 빠져 과거도 제대로 보지 않고, 시장의 아이나 방자, 환쟁이 등에게 놀림을 받는 인물이다. 성적 욕망이 매우 강해 미색을 탐하다가, 생사(生死)조차 분별하지 못하고 계략에 넘어간 어리석은 인물로 형상화됐다.
매화는 강릉 최고의 명기(名妓)로, 부사의 분부에 따라 골생원을 곯리고 망신을 주는 데 조력하는 인물이다. 매화는 일반적으로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다소 염색(艶色)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어 기생의 이름으로 많이 쓰였다. 〈강릉매화타령〉이라는 작품명에 따르면, 마치 매화가 사건을 주도하는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매우 수동적인 인물이다. 처음부터 강릉부사에 의해 골생원의 수청기(守廳妓)가 되어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골생원에게 욕정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후 죽어서 귀신이 된 체하며 골생원이 알몸으로 망신을 당하도록 한 것도 부사의 명을 따른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매화는 적극적인 여성 인물로 나타나는 〈무숙이타령〉의 의양이나 〈배비장전〉의 애랑과 비교된다.
강릉부사는 골생원을 책방으로 데려온 인물로, 기괴한 그의 외모보다 그의 '포재(抱才)와 문필(文筆)'을 아꼈다. 그를 아끼는 마음에 강릉 최고의 기생인 매화를 내어줬지만, 골생원이 그녀의 미색에 빠져 완전히 분별력을 잃게 되자 그를 속일 계략을 세우게 된 것이다. 계략이 다소 과하기는 했지만, 단순히 골생원을 망신시킬 의도였다기보다는 골생원에게 따끔한 경계의 교훈을 주고자 한 부분이 컸다. 사설에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골생원이 양반으로서의 본분을 잃게 된 데에는, 처음 매화를 수청기(守廳妓)로 준 부사 자신의 책임도 크다는 사실을 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외에 방자인 달랑쇠와 매화의 나체를 그려주는 환쟁이가 골생원을 조롱하는 인물로 등장하며, 시장의 아이는 골생원의 줏대 없고 무능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강릉매화타령〉의 주제는 창본 〈매화가라〉 말미의 "어화 세상(世上) 사람들아 골생원(骨生員)으로 볼지라도 주색탐(酒色貪)을 부디 마소"에 집약되어 있다. 과도하게 여색에 집착하는 태도에 대한 경계가 이 작품의 주제인 것이다. 이는 신재효와 정현석의 〈강릉매화타령〉 관련 기록에서도 제시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당시 사회가 요구했던 도덕적 교훈이자 표면적인 주제일 수 있다. 실제로 양반이 미색을 탐하다 주변 인물들의 계략에 속아 망신을 당하는 〈강릉매화타령〉류의 판소리를 즐겨 들었던 일반 대중들은 오히려 위선적인 양반의 타락과 망신을 비웃으며, 작품 곳곳의 해학과 풍자에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역대 명 연희자
〈강릉매화타령〉의 창자로 알려진 명창은 없다.
연희본
〈강릉매화타령〉의 연희본으로는 이영규 소장 〈매화가라〉와 김석배 소장 〈골생원전이라〉의 2종이 보고되었다.
전주의 중학교 교사 이영규(李永圭)가 소장하고 있었던 〈매화가라〉는 1993년 김헌선에 의해 학계에 보고되었다. 〈매화가라〉의 보고는 단편적인 기록만 전할 뿐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었던 〈강릉매화타령〉의 실체를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자료는 겉표지가 없고, 속 첫 장에 "梅花歌라"라고 되어 있다. 총 19장으로, 책 크기는 가로 21.7㎝×세로 23.6㎝이다. 필사자나 필사연대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한글과 한자 표기를 혼용하고 있다.
〈골생원전〉은 2002년 김석배에 의해 보고된 이본이다. 표지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지만 작품이 시작하는 부분에 "골생원젼이라"라는 제명이 기록되어 있어 〈강릉매화타령〉의 이본임을 알 수 있다. 총 52장으로 책 크기는 가로 12.2㎝×세로 24.5㎝이다. 역시 필사자나 필사연대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필체로 보아 세 사람이 나누어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매화가 골생원을 벗겨 경포대로 데려가는 부분부터 낙장된 결본(缺本)이나, 〈매화가라〉에 비해 내용이 풍부하고 사설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의의
〈강릉매화타령〉은 탈선한 양반이 기생과 동료 양반의 공모에 의해 망신을 당하는 '골탕 먹이기'의 구조로 된 작품이다. 지방 관아를 배경으로, 지방 수령과 관계된 인물이 여색을 탐하다가, 지방수령·기생·관아 주변인물 등의 공모에 의해 골계적인 사건을 겪는다는 점에서 판소리 〈배비장전〉과도 유사하다. 다만 골생원이 처음부터 호색한(好色漢)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는 〈배비장전〉의 배비장보다는 〈무숙이타령〉의 무숙이와 비슷하다. 한편 유사한 줄거리를 가진 세태소설 〈오유란전〉, 〈종옥전〉과도 비교되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 김기형 역주, 『적벽가·강릉매화타령·배비장전·무숙이타령·옹고집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5.
- 김석배, 「골생원전 연구」, 『고소설연구』 14, 한국고소설학회, 2002.
- 김종철, 『판소리의 정서와 미학-창을 잃은 판소리를 중심으로』, 역사비평사, 1996.
- 김헌선, 「〈강릉매화타령〉 발견의 의의」, 『국어국문학』 109, 국어국문학회, 1993.
- 인권환, 「失傳 판소리 사설 연구 : 강릉매화타령, 무숙이타령, 옹고집타령을 중심으로」, 『동양학』 26,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6.
참조어
강릉부사, 골생원(骨生員), 매화(梅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