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우

이건우

[ 李健雨 ]

요약 작곡가(양악). 내무성예술단 소속. 강원도 삼척(三陟) 출생.
출생 1919년
이건우

보통학교 때 바이올린을 배웠고, 동경고등음악학원(東京高等音樂學院: 현 구니타치음악대학 전신) 작곡부를 거쳐 1942년 동경제국음악학원(東京帝國音樂學院) 기악부(바이올린 전공)를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 중 1940년 마이니치(每日)신문사 주최 제9회 일본음악콩쿠르 작곡부에서 "바이올린 조곡"으로 3위 입상했고, 1942년 요미우리(讀賣)신문사와 동보영화사가 공동 주최한 제1회 교향곡 현상모집에서 교향시 "청년"으로 2위 입상하였다. 1942년 피아노곡 "민요와 변주곡"을 발표했다.

1943년 귀국한 후 잠시 징집을 피해 강원도 양양(襄陽)에서 피신생활을 하다가 1944년 개성고등여학교 음악교사를 거쳐 강릉고등여학교 음악교원 생활 중 해방을 맞았다. 전일본음악콩쿠르의 실내악작곡에 입상했다는 소식은 『文章』(1941) 3권 1호에 발표한 윤석중(尹石重)의 "동경통신"(東京通信)에 소개되었다.

1945년 12월에 결성된 조선음악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해방 직후 해방가요 "여명의 노래"와 통일전선조직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노래인 "민전행진곡"을 작곡하였다. 8·15광복 직후 애창된 해방가요로 "여명의 노래"가 있고, 프롤레타리아의 해방가요로 "민전행진곡"이 있다. 1945~1953년 사이에 작곡된 가곡으로 "붉은 호수"·"금잔디"·"가는 길"·"엄마야 누나야"·"산"·"자장가"·"꽃구름 속에"·"소곡"·"추풍령"·"빈대" 등이 있다.

1946년 조선의 음악아카데미즘의 수립을 목적으로 한 「음악가의 집」 회원으로 있으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했다. 1946년과 1948년 이건우작곡발표회를 열었다. 1948년 가곡집 『금잔디』와 『산길』을 발간했으며, 한편 김순남·박영근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과 조선음악가동맹(朝鮮音樂家同盟)에서 중앙위원으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울지구 부서기장을 지냈다.

1950년 6·25전쟁 때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전선지구경비대 사령부예술단 작곡가로, 내무성예술단 작곡가 및 단장으로 있으면서 "소년 빨치산의 노래"를 비롯한 많은 전시가요와 합창 "나의 고지"를 창작하였다. 1953년 숙청 당했다가 1960년 복원되어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작곡가동맹 창작실 작곡가로 있으면서 교성곡 "하나된 조국을 위하여,"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조곡 "행복한 마을에서," 가요작품 "동백꽃"·"창성은 좋아"·"우리는 자랑찬 천리마작업단," 합창 "노호하라 남해바다여"를 작곡하였다.

1970년부터 혁명가극 "피바다"·"밀림아 이야기하라"·"한 자위단원의 운명"·"은혜로운 햇빛 아래"·"연풍호" 창작에 참가하여 노래와 장면음악을 작곡하였다. 국기훈장 2급을 비롯한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윤이상음악연구소 연구사로 일하였다.

작품으로 "피아노곡 민요와 변주곡"(1942)·"소년 빨치산의 노래"·"동백꽃" 등이 있다.

1988년 10월 6일 월북작곡가의 해금 가곡제 때 "엄마야 누나야"·"금잔디"·"산" 등이 공연됐고, 11월 28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월북작곡가들의 해금 가곡제가 열렸다. 1992년 2월 24일 민족음악연구회의 분과연구발표회(노래분과) 때 "금잔디"가 연주되었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6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