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

김순남

[ 金順男 ]

요약 작곡가(양악). 국립민족예술극장 소속. 서울 출생.
출생 - 사망 1917년 ~ 1986년
김순남

어머니로부터 어려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교동초등학교 시절에는 노래도 잘 불러 학교에서도 유명했고, 제일고보(第一高普)와 경성사범(京城師範) 두 곳에 모두 합격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경성사범 재학시절 김영환(金永煥)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등 전문음악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음악부장을 맡아 취주악대를 지휘하였다. 독학으로 작곡공부를 해 사범학교 4학년 때에는 기숙사의 사가(舍歌) 모집에 응모하여 당선했다. 1937년 21세의 나이로 경성사범학교 연습과를 졸업하였다.

수원공립보통학교의 교직생활을 시작했으나, 그해 11월 음악공부를 위해 사직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8년 일본 동경고등음악학원(東京高等音樂學院: 현 구니타치음악대학 전신) 작곡부에 입학함으로써 본격적인 작곡공부를 하게 되었다. 1938년에 입학해서 1939년 작곡부 2년을 수료한 뒤 1940년에는 다시 동경고등음악학원에 피아노 전공으로 편입했다. 재학시절 사사한 작곡 교수 하라 다로와의 만남은 그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움을 추구하며 냉철한 비판력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일본 프롤레타리아음악가동맹의 서기장을 지낸 스승의 사상적 이념은 김순남이 뒷날 사회주의운동에 빠져드는 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1939년 동경고등음악학원 재학 시절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을 1940년에 개최된 「일본현대작곡가연맹 창립10주년기념 작곡발표회」 때 발표하였다. 1940년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東京帝國高等音樂學校) 기악부(피아노 전공)에 편입해 재학 중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을 일본 현대작곡가연맹 창립 10주년기념 작곡발표회에서 일본의 저명한 작곡가들과 함께 발표해 작곡가로서 기량을 인정받았다. 1942년 여름학교를 졸업하자 귀국한 후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44년 12월 17일 부민관에서 「김순남 제1회 작곡발표회」를 열고 "피아노트리오 결혼"·"피아노 소나타 제2번"·"피아노 트리오"·"민요풍 기악곡" 등을 발표했다. 강장일(姜長一)·신막(愼莫)·이범준(李範俊)과 함께 성연회(聲研會)라는 지하음악단체를 조직해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을 주도하였다. 1944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음악 강사가 됐다. 같은 해 제1회 작곡발표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김순남 작곡의 건국행진곡(『金順男 그 삶과 예술』)

김순남 작곡의 건국행진곡(『金順男 그 삶과 예술』)

1945년 광복 후 출간된 최초의 창작가곡집인 『산유화』(山有花)를 발행했다. 8·15광복의 기쁨을 담은 그의 대표적 해방가요(解放歌謠)로 "해방의 노래"·"건국행진곡"(建國行進曲)이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해방가요로는 "농민가"·"남조선 형제여 잊지 말아라"·"인민 유격대의 노래"·"조선 빨치산의 노래" 등이 있다.

8·15광복 이후 발표한 가곡으로 "바다"·"그를 꿈꾼 밤"·"잊었던 마음"·"초혼"·"자장가"·"진달래꽃" 등이 있고, 그의 "탱자"·"상렬"·"철공소"·"양"은 계급의 모순 또는 현실의 모순점을 해학과 풍자로 비유한 사실주의적 경향의 가곡들이다.

1945~1953년 사이에 작곡된 가곡으로 "바다"·"산유화"(山有花)·"잊었던마음"·"초혼"·"자장가"·"탱자"·"상렬"·"양"·"철공소"·"진달래꽃"이 있고, 1947년 "산유화"와 "진달래꽃"을 발표하였다. 1946년 한때 북한의 국가(國歌) 대용으로 불린 "인민항쟁가"를 작곡했다. 1948년 남한정부로부터 좌익음악가라는 이유로 체포령이 내려져 월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립대표 및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참가했고, 1951년 3월 결성된 조선음악가동맹(朝鮮音樂家同盟)의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 후 해주음악전문학교(海州音樂專門學校) 작곡 교수, 1952년부터 구소련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음대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국립민족예술극장 작곡가가 되었다. 이 시기 민요와 민족기악곡을 수집·연구했으며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가극 "인민유격대," 교향곡 "영웅 김창걸," 합창과 관현악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 바이올린독주곡 "이른 봄," 가요 "노동자의 노래"·"농민의 노래"·"조선빨치산의 노래"·"조중친선의 노래"를 비롯한 많은 가요와 기악곡을 작곡했다.

1953년부터 반동음악가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으며, 1958년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창작의 권리도 제한되었다. 1960년대 조선음악가동맹 현역 작곡가로 있으면서 "인민항쟁가"를 대합창으로 편곡해 공연했으며, 수 편의 조국통일을 주제로 한 가요를 작곡하였다. 1964년경 복권됐으나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으며, 1986년 무렵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으로 "교향곡 1번"(1947)·"피아노 소나타 제1번" (1939)·"피아노 트리오 결혼"(1944)·"산유화"(1947)·"인민유격대의 노래"(1947) 등이 있고, 작품집으로 『산유화』(1947)·『자장가』(1948)가 있다.

1988년 10월 6일 월북작곡가의 해금(解禁) 가곡제 때 가곡 공개연주가 열렸다. "산유화"·"진달래꽃"·"초혼" 등이 공연됐고, 11월 28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월북작곡가들의 해금 가곡제가 열렸다. 1993년 4월 9일 93새마당 Ⅱ(한국의 예술가곡) 때 "탱자"가 연주되었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161~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