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충사 소장 고경명 문적

포충사 소장 고경명 문적

[ 褒忠寺 所長 高敬命 文籍 ]

요약 포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경명 부자와 포충사에 관련된 문서. 1994년 7월 21일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포충사 소장 고경명 문적

포충사 소장 고경명 문적

지정종목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지정일 1994년 7월 21일
관리단체 포충사관리사무소
소재지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776번지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기록유산 / 문서류 / 사찰문서 / 기문류

1994년 7월 21일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경명(高敬命)과 그의 아들 인후(因厚)·종후(從厚), 그리고 포충사와 관련된 문서 9종이다.

이 문서들은 사우(祠宇)를 관리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한 일과 충신·효자 가문에 대하여 나라가 어떤 예우를 했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들로, 명문 2점, 입안문 1점, 교지 4점, 유묵 2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문(明文)은 1601년 나라에서 고경명 3부자를 위하여 포충사를 지어 봄·가을에 제향하도록 하고 포충사라는 사액(賜額)까지 내린 데 대하여 그의 후손들이 감격하여 자신들의 전답과 노비를 영원히 포충사에 헌납하기로 한 일을 기록한 증서이다. 입안문은 그들의 재산 헌납에 관하여 관청이 인가를 했다는 증명서이다.

이밖에 포충사의 관리와 관련하여 왕이 내린 문서인 〈제위답영납명문〉과 〈수직노영납명문〉등 교지 4권, 고경명이 직접 지은 격문과 〈세독충정(世篤忠貞)〉이라는 휘호의 유묵 2점 등이다.

고경명(1533~1592)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1558년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관직에 들어간 후 내외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58세가 되던 해인 1591년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관계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조헌의 의병과 합류하여 금산싸움에서 왜적과 싸우다 아들 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재봉집(齎峰集)》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역참조항목

대촌동

카테고리

  • > > >
  • > > >
  • > > >

관련이미지

포충사 소장 고경명 문적

포충사 소장 고경명 문적 광주시 남구 원산동. 임진왜란때의 의병장고경명과 그의 아들 인후·종후, 그리고 포충사와 관련된 문서 9종이다. 명문 2점, 입안문 1점, 교지 4점, 유묵 2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