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조각

고려의 조각

남원 실상사 승탑

남원 실상사 승탑

고려시대의 조각 작품으로는 약간의 능묘조각(陵墓彫刻)이 있기는 하나 불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태조(太祖)는 건국의 대업이 불력(佛力)에 있었음을 깊이 믿어 사건립과 불상 조성이 자못 활기를 띠었으며, 한편으로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도 중요시하였다. 건국 초에는 거대한 석상들을 만들고 9세기 이래의 유행을 따라 철불(鐵佛)의 조성이 성행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불상의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하면, 첫째 전대의 이상주의적인 표현이 사라지고 현세구복(現世求福)을 위주로 하는 현실주의적인 조형(造形)으로 변하였다. 전대의 불상은 단정장중하며 이러한 외형을 통하여 내재한 불성이 표출되고 있으나, 고려시대가 되면 세속적인 인간을 대하는 듯 감동 없는 조형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감각은 조형 그 자체의 차이에 기인하지만, 전대의 불상이 거의 완전한 데생을 기반으로 제작되어 안정된 시각적 효과를 거두고 있는 데 비해 고려시대의 불상은 인체의 비례나 세부적인 표현 기법에 있어 표현력의 부족에도 기인하는 바 크다.

북한산 구기리(北漢山舊基里) 마애석가여래좌상(磨崖釋迦如來坐像), 안동 이천동(安東泥川洞)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등의 석상이나, 광주 춘궁리(廣州春宮里)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적조사 철조여래좌상(寂照寺鐵造如來坐像) 등의 철불들은 전대의 양식을 계승한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전대의 불상과의 차이를 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 다시 나타나는 불상의 미소도 역시 삼국시대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 불상의 하나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작풍이 나타나게 된 정신적인 배경과 조형 기술이 분명히 일보 퇴화하게 된 이유는 간단히 설명될 수 없겠으나, 선풍(禪風)의 진작으로 인한 조형미술 제작의욕의 퇴색경향과도 관계가 깊으리라고 생각된다.

둘째, 지역적으로 특색 있는 양식이 나타나는 점이다. 강릉(江陵) 한송사 석조보살좌상(寒松寺石造菩薩坐像)을 대표로 하는 신복사지(神福寺址) 3층석탑 앞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 앞 석조보살좌상 등의 동해안 지역의 불상, 또는 충주(忠州) 대원사(大圓寺)와 단호사(丹湖寺)의 양구(兩軀)의 철조여래좌상 등의 양식은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닌 불상들로 지역적인 특색이 뚜렷하다. 이와 같이 불상에서 지역적 특색은 지방호족들의 세력 기반과도 관계가 깊을 것이지만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하나의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고려 후기에 라마교 불상형식이 침투하였다는 사실이다. 라마교 불상의 형식은 매우 환상적이지만, 그 형식을 그대로 전수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불상의 기본형식 위에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고려 후기 금동보살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신구나 대좌의 형식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또 라마탑(塔)의 형식을 마곡사(麻谷寺) 석탑의 상륜부(相輪部)에서 엿볼 수 있는 것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라마교 불상형식의 전래는 원(元)의 세력침투에서 비롯된 듯하니 고려 후기 미술 전반에 걸쳐 원의 영향이 나타나는 추세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불상을 재료면에서 분류하면 석불이 가장 많고 금동불·철불도 전대에 이어 많이 제작되었으며, 이 밖에 소조불(塑造佛)·건칠불(乾漆佛) 등도 다소 제작되었다.

철불은 9세기부터 다수 제작되어 수구(數軀)의 재명불(在銘佛)도 현존하지만 고려시대에도 그 제작이 성행하여 전기한 광주 춘궁리(廣州春宮里) 철조여래좌상이나 개성(開城) 적조사지(寂照寺址) 철조여래좌상, 충남 보원사지(普願寺址) 철조여래좌상 등은 그 대표작들이며, 이 밖에도 많은 수작들을 남겼다. 불신(佛身)의 표현이나 옷무늬의 처리는 매우 착실하며 특히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고려 철불의 하나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철불이 현저하게 증가하는 반면 동불 및 금동불이 현저하게 감소하는데, 이는 동 생산의 감소에 기인한 듯하며 고려시대 철불은 그 수나 질에 있어서 한국 불상의 대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소조불이 삼국시대에도 제작되었음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양지사(良志師)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고, 경주(慶州) 능지탑(陵旨塔)에서 통일기의 대소조불(大塑造佛)의 존재가 알려졌으나, 고려시대 이전에는 거의 없다. 고려시대 소조불로서는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의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으며, 상호(相好) ·옷무늬 등에 변화가 있지만 전대 불상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수작이다. 건칠불도 구 덕수궁미술관(舊德壽宮美術館)에 수장되었던 몇 가지가 있을 뿐, 고려시대 이전에 제작된 유례가 없으며 제작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고려시대에 이르러 송나라의 영향 아래 그것이 한때 유행하였음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송나라에서 건칠불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조불과 건칠불의 유례가 매우 드문 이유는 내구성이 떨어지는 탓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조각으로 능묘의 상설(像設)을 뺄 수 없으나 고려의 역대 왕릉은 워낙 퇴락이 심해서 겨우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과 왕비(王妃)의 정릉(正陵)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현릉과 정릉은 동서로 나란히 있고 각각 난간을 돌렸다. 두 능 앞에는 3단의 축대가 있어 상단에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중단에는 문인석(文人石)을, 하단에는 무인석(武人石)을 각각 배열하였고, 호석(護石)에는 연화(蓮華) ·삼고령(三鈷鈴) ·수관인신(獸冠人身)의 십이지상(十二支像)들이 조각되었다. 이들 조각은 고려 말기의 조각에서는 보기 드문 걸작이나 장식성이 지나치고 평면적이며, 석인(石人) ·석수(石獸)의 표현도 전대의 작품에 미치지 못한다.


끝으로 귀부(龜趺)와 이수(螭首)의 조각이 있다. 귀부는 일찍이 신라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에서부터 나타나 능비(陵碑)나 승려(僧侶)의 탑비(塔碑)로서 많이 제작되었고, 고려시대에도 부도 건립의 성행에 따라 탑비의 건립 또한 성행하였다. 귀부의 기본형은 거북의 형태이지만 두부(頭部)를 함주(含珠)한 괴수형(怪獸形)으로 표현한 조각 기법은 환상적이다. 또 귀갑(龜甲)무늬 속에는 이따금 王자를 조각하였는데, 조각 자체가 매우 정교하여 부도의 표면조각과 함께 고려시대의 하나의 특색 있는 작품이 되고 있다. 이수에 운룡을 조각하는 수법 역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에서 비롯하여 고려시대까지 계승되었으나 약간의 변화가 나타난다. 즉, 이수 상면에 화염보주(火焰寶珠)를 장식하게 되고 전체의 형태가 차차 옥개(屋蓋) 형식으로 변해서 무열왕릉비의 이수가 중국의 원규형(圓圭形) 이수형식을 따르고 있는 점과는 대조적이며 이 또한 고려시대 이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개성(開城) 현화사비(玄化寺碑), 원주(原州)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에서와 같이 비신(碑身) 좌우면에 웅건한 수법으로 용을 조각한 걸작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비석(碑石)에는 건립연대가 명기되므로 이에 딸린 귀부나 이수의 제작연대가 분명하게 되어, 고려시대의 이러한 유형의 조각 연대 설정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