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의 연혁

대구광역시의 연혁

달서구 월성동에서 출토된 새기개·좀돌날[細石刃]·긁개를 비롯한 구석기시대 유물과 수성구 파동에서 확인된 바귀그늘유적 등의 구석기시대 유물과 유적, 북구 서변동과 동구 대림동·사복동 등지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들, 수성구 사월동·상동과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가창면 냉천리 등지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군(支石墓群) 등 선사시대부터 대구 지역에 취락이 형성되었던 유적 및 유물이 확인된다.

삼국시대

삼한시대에 변진(弁辰) 24국에 속하였다가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삼국사기》에 261년(첨해이사금 15)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달벌성 또는 달불성(達弗城)은 후에 달성(達城)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달성군의 지명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신라의 군현(郡縣) 체제하에서 대구 지역은 양주(良州)에 속한 위화군(喟火郡)이 설치되어 달구화현(達句火縣)·팔거리현(八居里縣)·다사지현(多斯只縣)·설화현(舌火縣)의 4개 현을 관할하였다. 이밖에 압량군(押梁郡)의 치성화현(雉省火縣) 또는 미리현(美里縣)도 지금의 대구 지역의 일부에 해당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757년(경덕왕 16) 주·군·현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위화군은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은 대구현(大丘縣)으로, 팔거리현은 팔리현(八里縣)으로, 다사지현은 하빈현(河濱縣)으로, 설화현은 화원현(花園縣)으로, 압량군은 장산군(獐山郡)으로, 치성화현은 해안현(解顔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대구(大丘)라는 지명은 이때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조선 정조 이후 '丘'와 '邱(구)'가 혼용되다가 철종 때부터 '大邱'로 굳어져 지금에 이른다. 수창군은 지금의 신천 상류 지역에 해당하며, 대구현은 지금의 대구 중심부인 신천 중하류 지역, 팔리현은 칠곡군 칠곡면에서 대구로 편입된 북구 지역, 하빈현과 화원현은 지금의 달성군 지역에 해당하며, 장산군은 지금의 경북 경산시, 해안현은 지금의 대구시 동구 지역에 해당한다.

고려시대

고려가 개국한 뒤, 고려와 후백제의 각축장이 되어 927년(태조 10) 팔공산에서 공산전투(公山戰鬪)가 벌어졌다. 1018년(현종 9) 전국 행정구역이 4도호부 8목(牧)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수창군은 수성군(壽城郡)으로 개칭되어 해안현과 함께 동경(東京)의 속군·현이 되었고, 대구현은 상주목(尙州牧) 경산부(京山府)의 속현이 되었다. 또한 팔리현은 팔거현(八居縣, 후에 八莒縣)으로 개칭되어 경산부의 속현이 되었다. 1143년(인종 21) 대구현에 현령이 파견되어 지방관이 관할하는 주읍(主邑)이 되었고, 화원현과 하빈현은 대구현의 속현이 되었다. 12세기 무신의 난 이후 대구 부근의 청도·밀양·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나자 대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232년(고종 19) 몽골의 2차 침입 때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보관하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다. 충렬왕(재위 1274~1308) 때 의성현이 대구현에 일시적으로 병합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1390년(공양왕 2) 수성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이 개국한 뒤, 1394년(태조 3) 수성현과 해안현이 대구에 편입되었다가 이듬해에 경주로 이관되었다. 1413년(태종 13) 전국이 8도로 재편되면서 경상도에 속하였으며, 이듬해에 수성현과 해안현이 다시 대구현에 편입되었다. 1419년(세종 원년) 대구현이 대구군(大邱郡)으로 승격된 데 이어 1466년(세조 12)에는 대구군이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로 승격되어 수성현·해안현·하빈현을 관할하였다. 1601년(선조 31) 경상도 감영(監營)이 지금의 중구 포정동으로 이전하면서 경산현(慶山縣)·하양현(河陽縣)·화원현이 대구부의 관할로 편입되었다가 1608년(선조 40) 경산현과 하양현은 대구부에서 분리되었다. 1684년(숙종 10)에는 밀양부에 속한 풍각현(지금의 경북 청도군 풍각면)의 각북면(角北面)·각현내면(角峴乃面)·각초동면(角草洞面)·각이동면(角而東面) 등 4개 면이 대구부에 편입되었으며, 1735년(영조 11) 대구읍성이 석성으로 축조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면서 대구도호부는 대구부가 되어 대구군·경산군·칠곡군·성주군·청도군을 비롯한 23개 군을 관할하였다. 이듬해 23부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13도로 재편되면서 대구군은 2등군으로서 경상북도에 속하였으며, 34개 면(동상면·서상면·동중면·동하면·해서촌면·해북촌면·해서부면·해동촌면·수북면·수동면·수현내면·하수남면·하수서면·상수남면·상수서면·서중면·달서면·성서면·하동면·하북면·하서면·하남면·감물천면·조암면·월배면·인흥면·화현내면·옥포면·법화면·성평곡면·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을 관할하였다. 1906년(광무 10)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이 청도군에 이속되어 30개 면으로 축소되었고, 1907년 서상돈(徐相敦)·김광제(金光濟) 등을 중심으로 한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일제강점기

1910년 하수서면이 상수서면에 병합되고 대구군이 대구부로 개칭되었으며, 1911년 동상면과 서상면을 통폐합한 대구면이 설치되어 28개 면으로 축소되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이 시행되어 대구부는 지금의 중구 대부분과 북구 칠성동에 해당하는 대구면만 관할하고 나머지 지역은 신설된 달성군에 편제되었다. 이후 1917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과 봉덕동 일부가 대구부에 편입되어 대봉동이 신설되었고, 1938년에는 수성면 전역의 14개 동과 성북면의 4개 동, 달서면의 10개 동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이에 관할구역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편입된 수성면 14개 동 지역에 동부출장소, 달서면 10개 동에 서부출장소, 성북면 4개 동에 북부출장소가 각각 설치되었다.

대한민국

8·15광복 후에도 유지되던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이 1947년 우리말 동명(洞名)으로 정비되었으며, 1948년 대구부가 대구시로 개편되었다. 1951년 시 직할 지역인 남산동·대봉동·봉덕동·대명동을 관할하는 남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53년에는 중부출장소와 종로출장소가 신설되어 총 6개 출장소에서 87개 동을 관할하였다. 1958년 달성군의 공산면 18개 동과 동촌면 10개 동, 가창면 13개 동, 성서면 13개 동, 월배면 7개 동 등 5개 면 61개 동이 대구시에 편입되어 이들 지역을 관할하는 공산·동촌·가창·성서·월배 출장소가 신설되어 11개 출장소 148개 동으로 확대되었다. 1960년에는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는 2·28학생의거가 일어나 이듬해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1963년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종로·중부 출장소 구역은 중구(54개 동), 동부·동촌 출장소 구역은 동구(24개 동), 서부출장소는 서구(10개 동), 남부출장소는 남구(4개 동), 북부출장소는 북구(9개 동)로 각각 승격되어 5개 구 101개 동으로 재편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에 환원되었다.

1980년 동구의 범어동·수성동1~4가를 비롯한 13개 동이 분리되어 수성구(15개 동)가 신설되었고,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과 함께 경산군 안심면과 달성군 공산면 전역이 동구로, 달성군 성서읍 전역이 서구로, 달성군 월배읍 전역이 남구로, 칠곡군 칠곡읍 전역이 북구로, 경산군 고산면 전역이 수성구로 각각 편입되었다. 1984년 인구 200만 명을 넘어섰으며, 1988년 서구의 성서 지역과 남구의 월배 지역 전역 그리고 기존의 일부를 분리·병합하고 두류동을 신설하여 14개 행정동으로 편제된 달서구를 설치하였다. 1995년 대구광역시 승격과 함께 달성군(1읍 8면) 전역이 경상북도에서 분리되어 대구로 편입되었으며, 2023년 7월에는 경북 군위군이 대구시로 편입되어 8개 특별·광역시 가운데 가장 큰 면적을 보유하게 되었다. 2023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7구(중구·동구·서구·남구·북구·수성구·달서구) 2군(군위군·달성군) 7읍 10면 133행정동 195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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