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역사

덴마크의 역사

바이킹의 무덤

바이킹의 무덤

덴마크 왕국에 관해서는 초기 바이킹시대인 800년경, 즉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재위 768∼814) 때 그 최초의 기록이 나타난다. 덴마크의 고드프레드왕은 카를 대제의 북방진출을 저지하고, 다시 그의 아들 헤밍왕은 811년 조약을 체결하여 아이더강(江)을 프랑크 왕국과의 경계로 설정하였다. 그 경계선은 그 뒤 일시적인 침범을 받은 적은 있으나 1864년까지 지속되었다. 헤밍왕이 죽은 뒤 왕국이 해체되었다가 10세기에 북(北)유틀란트의 예링에서 일어난 왕조에 의해 재통일되는데, 예링에 있는 당시의 암석각문(岩石刻文)에는 룬(rune)문자로 새긴 덴마크 왕국의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국토 통일을 완수한 하랄왕은 960년경 국민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그의 아들 스벤(스웨인) 1세는 1013년 잉글랜드를 정복하였다.

스벤의 아들 크누드(카누트) 대왕(재위 1014∼1035)은 덴마크와 잉글랜드 및 노르웨이의 왕위를 겸하는 대왕국을 창건하였다. 크누드가 죽자 곧 그 대왕국은 분열되고, 덴마크는 다시 스칸디나비아의 한 세력으로 전락하였으나, 크누드의 조카 스벤 2세에 의해 로마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신(新)덴마크 왕국이 건설되었다. 스벤 2세가 죽은 뒤, 1074~1134년까지 스벤 2세의 다섯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그 동안에 한때 앵글로색슨의 세력하에 있던 덴마크교회는 다시 함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갔다가 1104년경 룬드를 대주교구(大主敎區)로 한 독자의 국교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134년 이후, 다시 교회와 국가의 분열 및 국내분쟁이 지속되다가, 1157년 발데마르 1세(재위 1157∼1182)가 일어나서 국내를 통일하고 발데마르 왕조를 일으켰다. 발데마르 1세는 군사력을 재편성하여 독일에 대항하고 발트해의 슬라브 세력과 싸웠는데, 그때 슬라브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셸란섬에 구축한 성새(城塞)가 오늘날의 코펜하겐의 기원이 되었다.

발데마르 2세(재위 1202∼41) 때 정치적·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으나, 그가 죽자 다시 왕·교회·귀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서 왕권이 약화되고, 또 같은 시대에 발트해(海)의 지배 및 슐레스비히의 영유를 둘러싸고 스웨덴·노르웨이·한자동맹 세력과의 항쟁이 지속되어 왕국의 약체화를 가져왔다. 발데마르 4세가 죽은 뒤, 발데마르의 딸 마르그레테와 그녀의 남편, 즉 노르웨이왕이자 스웨덴 왕위계승자인 호콘 6세의 아들인 올라프 2세(재위 1375∼87)가 왕위에 오르자 마르그레테가 섭정(攝政)이 되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해오다가 호콘 6세, 올라프 2세의 사후(死後) 1387년 덴마크 및 노르웨이의 군주로 승인받았다. 마르그레테는 다시 1389년 스웨덴왕을 겸하였다. 이와 같은 동군연합(同君聯合) 형태의 3왕국의 통합은 1397년의 이른바 칼마르동맹(The Kalmar Union)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1448년 덴마크의 왕조는 올덴부르크가(家)로 바뀌었으나 칼마르동맹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520년 크리스티안 2세(재위 1513∼1523)는 독립을 희망했던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보게순전투에서 스웨덴의 스투레 일파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스웨덴은 다시 봉기하여 독립을 이룩하였고, 1523년 칼마르동맹은 해체되었다. 덴마크의 종교개혁은 크리스티안 3세(재위 1534∼1559)에 의해 추진되어 루터파의 신교가 받아들여졌으며, 한편 그 무렵에 노르웨이는 자치운동이 완전히 봉쇄당한 채 사실상 덴마크의 속국이 되었다. 크리스티안 3세 때는 원로원 등 귀족세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해서 경제의 발전 및 학자의 배출 등 국가번영의 기운을 보였으나, 그 후 프레데릭 2세(재위 1559∼1588) 때 덴마크·스웨덴·폴란드·뤼벡 사이에 ‘북방 7년전쟁’이 일어났고, 크리스티안 4세(재위 1588∼1648) 때는 2차에 걸친 스웨덴과의 싸움으로 국토의 손실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1660년 프레데릭 3세(재위 1648∼70)는 귀족세력과 대립하는 도시부르주아 및 루터파 성직자와 결합하여 왕위의 세습제를 승인받고, 1665년에는 국왕의 절대주권을 승인받아 절대군주제(絶對君主制)를 확립하였다.

1788년 농노제가 폐지되고, 1797년 자유무역의 원칙에 입각한 관세법이 성립되어 덴마크의 경제가 활력을 얻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함대의 공격을 받고 나폴레옹 편에 서게 된 덴마크는 영국·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국과 싸운 끝에, 1814년의 킬조약에 의해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고 4세기에 걸친 노르웨이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국내적으로는 프레데릭의 절대왕정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1842년에는 입헌적 대의정치를 주장하는 국민자유당이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1849년 프레데릭 7세(재위 1848∼1863)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전제정치를 포기하고, 자유헌법을 성립시켜서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다.

1864년에는 1460년 이래 동군연합(同君聯合)의 형태로 덴마크에 속해 있던 유틀란트 남부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두 공국(公國)의 영유를 요구하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싸워서 패한 뒤 그것을 할양하였다. 그동안에 후사(後嗣)가 없는 프레데릭 7세의 뒤를 이어 글뤽스부르흐가(家)의 크리스티안 9세(재위 1863∼1906)가 왕위에 올라 왕조를 열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후로부터 내정이 안정되어, 국민의 역량을 농목업 및 해운업을 주축으로 하는 경제발전에 집중시켜왔으며, 20세기 초부터는 사회복지제도를 정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중립을 지키는 데 성공하여, 전후에는 주민투표에 의해 북(北)슐레스비히를 되찾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중립선언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침입을 받았으나, 전쟁피해는 비교적 적었다. 한편, 본래 노르웨이령이었다가 덴마크에 속하게 된 아이슬란드는 전쟁 중인 1944년 6월 동군연합을 해소하고 독립하였다. 전후에는 중립정책의 전통을 깨고 1949년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였고 미국에 그린란드의 기지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