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산

노래산

[ 老萊山 ]

요약 한국에서 조선후기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시대의 천주교 교우촌.

1815년 2월 부활절 축일을 기하여 일어난 을해박해 때 제일 먼저 관헌의 습격으로 신자들이 체포된 천주교 교우촌이다. 《한국천주교회사》 저자인 달레(Ch. Dallet)는 이 곳을 ‘모래산’으로 표기하였기에 청송군 현서면(縣西面) 백자동(栢子洞)의 ‘모래실’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그 원본인 다블뤼(Daveluy) 주교의 〈비망기(備忘記)〉에서 기술된 것처럼 노래산(Noraisan)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곳에서 체포된 사람들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전후하여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은둔하기에 적당한 이곳에 모여 교우촌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유박해 때 전라도 고산의 저구리골(현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운주면 적오리)에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고성대(高聖大) ·성운(聖云) 형제가 이곳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였고, 교우촌이 형성된 뒤에는 경상도 출신으로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 상당수 이주해 옴으로써 형세가 늘어났다.

이곳이 발각된 것은 전지수라는 배교자의 밀고 때문인데, 그는 1814년에 큰 흉년이 들자 경상도 여러 곳의 천주교 교우촌을 돌며 구걸을 하다가 신자들을 밀고해 많은 포상금을 얻을 목적으로 포졸들을 이끌고 이곳을 습격하였다. 이때 노래산 신자들이 제일 먼저 체포되었고, 이어 진보의 머루산(현 경상북도 봉화군 포산면), 영양의 곧은정(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우련밭(雨蓮田:현 봉화군 재산면)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을해박해(乙亥迫害)이다. 노래산에서 체포된 천주교도들은 모두 40명이었는데, 처음에 경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가 그 중 배교자와 옥사자를 제외한 14명이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이들 중 2명은 다시 배교하여 석방되고, 8명은 훗날 옥사하였으며, 고성대 ·성운 형제와 최성열(崔性悅) ·김화준 등 4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1816년 12월 대구 감영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후 이들 시신은 형장 근처에 매장되었다가 신자들에 의해 이듬해 다른 곳으로 옮겨져 무덤 네 개에 안장되었으나, 그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참조항목

신유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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