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진재

관동대진재

[ 關東大震災 ]

요약 1923년 9월 일본 간토[關東]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에 수반하여 일어난 일본 역사상 최대의 지진 피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중부에서 사가미만[相模灣] 동부, 스호[房總]반도에 걸친 일대를 진원지로 한 대지진이 간토지방을 엄습하였다. 지진의 강도는 최대 진도 매그니튜드 7.9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나면서 각지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일본의 심장부였던 게이힌[京濱] 지역은 순식간에 큰 타격을 받았으며, 피해는 남간토 일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시즈오카[靜岡]·야마나시[山梨] 두 현의 동부에까지 미쳤다. 첫 지진 이후 5일 오전 6시까지 인체에 느낀 여진(餘震)은 936회에 이르렀으며 해안지대에서는 해일의 피해도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순간 전화는 불통되었고, 교통기관은 파괴되었으며, 수도와 전기도 끊겼다. 도쿄에서는 대화재가 일어나 관청가의 일부와 가옥 밀집지대를 태우면서 9월 3일 새벽까지 계속 연소하였다. 이 대화재로 인하여 기온이 상승하여 도쿄[東京]의 밤기온이 46℃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호경기로 도시가 급팽창했는데도 아무런 도시계획도 마련되지 않아 목조가옥이 밀집해 있었고, 도로나 공원도 협소한데다가 이재민들이 들고 나온 가재도구들이 연소를 초래하여 소사자(燒死者)가 더욱 늘어났다. 요코하마[橫濱]에서는 전 도시가 괴멸되었지만, 며칠 동안이나 구호의 길이 막혔다. 1926년 도쿄 시청에서 발간한 《도쿄지진록 전집》에 의하면, 이재자(罹災者) 약 340만 명, 사망자 9만 1344명, 행방불명 1만 3275명, 중상 1만 6514명, 경상 3만 5560명, 전소(全燒) 38만 1090세대, 전괴(全壞) 8만 3819세대, 반괴(半壞) 9만 1232세대에 이르고 있다. 손해액은 약 55억 엔으로 추정되었는데, 1922년도의 일반회계예산이 약 14억 7000만 엔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손해액이 얼마나 막대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관동대지진으로 야기된 대혼란 속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은 그 후의 일본의 진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룩한 일본에서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운동의 고양(高揚)에 따라 민중운동이 조직화되고, 사회주의 운동도 대두되고 있었다. 여기에다가 대외적으로 한국과 중국의 반일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면서 이에 반발한 우익과 군부가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정부는 지진이 일어난 직후부터 비상경비에 들어갔던 육군에 정식으로 출병을 요청하고, 도쿄 시내 일부와 그 주변의 5개 군(郡)에 부분 계엄령을 내렸다. 그 직후 성립한 제2차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내각은 도쿄 전역과 가나가와현으로 계엄령을 확대 실시하는 동시에 비상징발령(非常徵發令)을 발하여 구호·복구 활동에 착수하였다. 일본 정부는 사태가 완전 수습된 후에도 11월 15일까지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고, 도쿄·가나가와·사이타마·지바 등 1부 3현 주민의 시민적·정치적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조선인 폭동설을 조작 유포시켜 각지에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시킨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수많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를 무차별 학살하는 일을 꾸미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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