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이즘

다다이즘

[ dadaism ]

요약 제1차세계대전(1914~1918) 말엽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

다다(dada)라고도 한다. 조형예술(造形藝術)뿐만 아니라 넓게 문학·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語)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木馬)를 가리키는 말이나, 이것은 다다이즘의 본질에 뿌리를 둔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다.

다다이즘은 처음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인 H.발이 카바레 볼테르를 개점하고, 시인인 T.차라, R.휠젠베크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반도덕·비심미적(非審美的)인 것을 찬미하였다. 차라는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鐵]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特急機關車)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有機體)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오늘날 말하는 자유분방한 오브제(objet)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중립(中立)을 선언하면서 스위스에 모인 망명자들의, 밖에서의 참혹한 살육을 의식한 발언이며, 그들은 종래의 예술작품이 외적(外的)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에서의 다다이즘은 베를린·하노버·쾰른 등 세 곳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R.하우스만, G.그로스, W.메링 등이 주된 예술가였는데, 여류인 H.헤히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취리히와는 달리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므로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하우스만의 아상블뢰즈(assambleuse:여러 가지 오브제 모음)나 헤히의 포토몽타주(2장 이상의 사진을 붙여 중복인화 ·중복노출 등으로 새로운 시각효과를 노림. 고안자는 J.하트필드라고도 한다) 이외에 그로스의 격렬한 반전(反戰) 시리즈인 《이 사람을 보라》 등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는 제1차세계대전 중의 군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전후의 황폐,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변해가고 있는 사회 상층계급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는 무산계급의 옹호를 그 특색으로 한, 예리한 시각의 소묘집(素描集)이다.

베를린에서의 다다이즘은 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중심 인물은 K.슈비터스였다. 슈비터스도 시와 조형(造形)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나타내어 1923~1932년 잡지 《메르츠》를 간행하고 있었는데 주목되는 작품은 《메르츠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 만든 기둥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주(collage)의 선구적 예(例)이기도 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콜라주는 다다이즘의 유력한 무기인데, 일찍이 입체주의(큐비즘)의 P.코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 수 있다. 다만 다다이즘의 경우에는 응용하는 소재를 신문지 ·우표 등에서 우모(羽毛) ·철사 ·성냥개비 ·화폐 등으로 더욱 넓히고 있으므로 작품 효과는 입체주의 시대의 것과는 현저하게 달라졌다. 슈비터스는 콜라주의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쾰른에서의 다다이즘은 M.에른스트와 J.T.바르겔트로 대표된다. 바르겔트는 잡지 《선풍기(扇風機)》의 창간자이기도 하며, 에른스트와 공동으로 제작을 시도한 일도 있는 화가로서 아상블뢰즈를 잘하였다. 에른스트의 기법(技法)은 콜라주이며, 19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주전(展)은 이제까지의 회화개념(繪畵槪念)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그는 1924년에 초현실주의(surréalisme) 운동에 참여하여 독특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타주(frottage)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그것을 보면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과정은 종이 한 장 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파리에서의 다다이즘 운동은 1919년에 이루어졌다. 자살한 23세의 시인 J.바셰 외에 ‘검은 유모어’의 A.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으로서 빼놓을 수 없으며, P.엘뤼아르, B.페레, L.아라공 등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뉴욕에서의 다다이즘은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제1차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19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展) 아모리 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출품된 M.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裸體)》는 사진가 A.스티그리츠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요소로서의 광채(光彩)라고까지 절찬한 브르통을 포함해서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작품은 순전히 메커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치 고속사진(高速寫眞)의 한 장면과 같이 역동적이며, 미래파(未來派)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후 뒤샹은 기성품(旣成品)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ready made)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M.레이의 《선물》(1921)이냐 뒤샹의 《샘[泉]》(1917)이냐라고 할 정도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F.피카비아, H.알프, 실험영화로 유명한 H.리히터도 빼놓을 수는 없다. 다다이즘은 제2차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라는 명칭으로 부활되었다. 부활의 배경은 전후 고조되고 있던 기계문명·인간소외 등의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