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

향교

[ 鄕校 ]

요약 고려·조선 시대에 유교를 교육하기 위해 국가가 지방에 설립한 중등교육 기관.
서천향교

서천향교

고려 때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각 지방에 박사와 교수를 보내 인재들을 교육하게 한 것이 시초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기능이 강화되어 조선 성종 때에 전국 모든 군, 현에 향교가 설치되었다. 향교가 세워진 목적은 인재를 길러 국가에 도움이 되는 관리를 키우고 고려 시대의 불교 중심 문화에서 벗어나 유교를 조선의 중심 이념으로 세우기 위해 이를 전파하고 교육하기 위함이었다.

향교의 기능

향교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을 했다. 첫째로 유교 예절과 경전을 배우는 교육기능이다. 학생들은 서당에서 나아가 향교에서 중등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유교 교육을 받게 된다. 시를 짓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經學)을 배우며 교재는 ‘소학(小學)’과 ‘가례(嘉禮)’, ‘사서오경(四書五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썼다. 수업 방식은 개별로 독서한 것을 읊고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두번째 향교의 기능은 유현(儒賢)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기능이다. 향교마다 모시는 위패는 다르지만 주로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음력 2월과 8월 중 좋은 날을 골라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낸다. 이처럼 향교는 유학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제사를 지내는 유학의 상징적인 장소였으며, 유학의 이념을 알리는 중심지 기능을 했다. 

그 외에도 향촌 기구로서 기능을 하기도 했다. 백성들을 취조하거나 유교 예절을 잘 지킨 이의 포상을 건의하여 고을의 풍속을 단속했다. 또 아이나 부녀자를 대상으로 강습을 열거나 고을 사람들이 모여서 즐길 수 있는 행사를 열었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지방 유림들의 의견을 모아 상소하는 장소가 되어 여론 형성의 기능을 했다.

향교의 교수진과 학생

향교의 교수진은 크게 교관, 교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교관은 조선 초기에 향교로 파견된 종 6품의 교수 72명과 종 9품의 훈도 257명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이 중앙 행정 관료로 가는 것을 선호하고, 지방 교관으로 가는 것을 기피하였다. 또한 사원의 발달로 인해 점차 향교의 교육기능이 쇠퇴함에 따라 영조 때 부터는 중앙에서 교관을 파견하지 않았다. 때문에 향교는 교임이라 불리는 지방 양반들로 구성된 교수진을 만들어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향교의 학생들은 교생이라고 불렸다. 조선 초기의 향교 입학 조건은 16세 이상 40세 미만의 평민 이상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추천과 시험을 통해 입학이 이뤄졌다. 조선 전기에는 학생들이 대다수 양반이었으나, 16세기 이후 양반의 자제들이 대부분 서원으로 가게 되면서, 향교의 학생 대다수가 평민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향교에 입학하게 되면 소과를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며 소과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모두 합격하면 진사나 생원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군역을 면제받는 특권이 있어 이를 위해 입학하는 경우도 많았다.

향교의 배치와 구성

향교의 배치는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의 위치에 따라서 전묘후학(前墓後學)과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로 구분된다. 전묘후학 배치는 대성전이 앞에 명륜당이 뒤에 있는 형태로 향교가 평지에 있는 경우 이러한 배치를 이룬다. 반대로 전학후묘 배치는 명륜당이 앞에 대성전이 뒤에 있는 형태로 향교가 경사진 곳에 위치할 때 주로 나타나며, 우리나라 향교의 대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이밖에도 대성전과 명륜당이 나란히 배치하는 병렬식 배치구조도 있는데, 이러한 배치구조의 향교는 경상남도의 일부 향교에서 찾을 수 있다.

향교 본문 이미지 1   

향교는 크게 대성전(大成展),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나눠져 있다. 대성전은 중국과 우리나라 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향교의 규모에 따라서 모시는 인물들은 조금씩 달라진다.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 앞쪽 좌우에 있는 공간으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우리나라 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위패의 수에 따라서 규모가 다양하며, 경우에 따라서 동무와 서무를 짓지 않는 경우도 있다. 명륜당은 유생들이 유학을 공부하는 공간이다. 조선 후기에는 교육 기능은 점차 약해지고 지역사회를 위한 상징적인 공간으로 기능했으며 주로 제사를 지낼 때 제관들이 대기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숙식과 공부를 하는 장소이다. 동재는 상급 유생이 사용하고 서재는 아래 유생들이 경우가 많았다. 이외에 제기를 관리하는 제기고, 교재를 찍어내거나 목판을 관리하는 경판고, 관리인이 사는 교직사 등이 있다.

 

향교 본문 이미지 2

향교의 쇠퇴

향교는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의 발달과 향교 교육에 대한 양반들의 외면, 교육적 효과의 부족 등으로 인해 점차 교육 기관으로서 기능이 쇠퇴되어갔다. 정부의 재정 궁핍으로 인한 지원감소 및 전쟁으로 인한 건물 소실, 인재 부족 등의 문제가 이어지다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교육기능은 잃고, 제향기능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참조항목

서당, 서원,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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