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Korea Democratic Party , 韓國民主黨 ]

요약 1945년 해방 이후 민족주의 계열이 만든 우익 정당.
구분 정당
설립일 1945년
설립목적 민족진영의 모든 세력 결집
주요활동/업무 대한민국 정부수립
소재지 서울

1945년 9월 16일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김병로(金炳魯)・장덕수(張德秀)・조병옥(趙炳玉)・윤보선(尹潽善) 등 민족주의 우파 계열의 지식인과 언론인, 자산가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설립한 정당이다. 약칭은 ‘한민당’이며,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명칭을 바꾸며 개편되었다. 한국 양당체제의 한 축을 이루어온 민주당(民主黨)의 뿌리이다.

창당 배경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여운형(呂運亨)과 안재홍(安在鴻) 등은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만들어 국내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며 정부 구성을 추진했다. 그러나 송진우 등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인사들은 권력을 독점하려 한다고 이를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세력 결집에 나섰다. 이들과의 협상이 8월 31일에 결렬되자, 다음날인 9월 1일 건국준비위원회 내부의 사회주의 계열 세력들은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여운형과 안재홍이 사임한 상태에서 확대위원들을 선임했다. 그리고 9월 4일 전체회의를 열어 허헌(許憲)을 새롭게 부위원장으로 선임하고, 9월 6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한 민족주의 계열의 세력들은 통합에 합의해서 9월 4일 ‘한국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에는 원세훈(元世勳)・조병옥 등의 고려민주당(高麗民主黨)과 김병로・백관수(白寬洙) 등의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 백남훈(白南薰)・장덕수・윤보선・장택상(張澤相)・허정(許政) 등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이 참여했다. 이들은 충칭[重慶]의 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임정봉대론(臨政奉戴論)을 주장하며, 9월 8일 “우리는 독립운동의 결정체이고, 현재 국제적으로 승인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소위 정권을 참칭(僭稱)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은 그 여하한 종류를 불문하고 이것을 단호히 배격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9월 16일 서울의 천도교회관에서 100여 명의 대표자들이 창당대회를 열어 정식으로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강령과 조직

한국민주당은 임정봉대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문창범(文昌範)・서재필(徐載弼)・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 임정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領袖)로 추대했다. 하지만 권동진과 오세창은 이를 거부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국내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실질적은 운영은 총무제를 기초로 이루어졌다. 송진우가 수석총무를 맡았으며, 1도 1총무의 원칙에 따라 함경도의 원세훈, 전북의 백관수, 경북의 서상일(徐相日), 경기도의 김도연(金度演), 경남의 허정, 충남의 조병옥, 황해도의 백남훈, 평안도의 김동원(金東元) 등 8명의 총무를 두었다.

당의 강령은 ① 조선 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② 민주주의의 정체 수립을 기함, ③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④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⑤ 국제연합(UN) 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 등이었다. 그리고 ① 국민기본생활의 확보, ②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 ③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④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⑤ 중공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⑥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⑦ 국방군의 창설 등을 주요 정책으로 제시했다

한국민주당의 주요 간부들 가운데에는 유학 등을 통해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당은 영국・미국식의 정치제도를 도입・확산시키는 것을 주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었다. 아울러 자산가와 지주 계층을 주요한 기반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공산주의에 적대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였던 농지개혁 문제에 대해서도 유상매수와 유상분배를 주장하며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국민주당은 9월 21일 나용균(羅容均)를 사무국장으로 사무국을 구성하고, 중앙부서의 조직과 인선을 확정했다. 중앙의 집행부서로는 외무부・조직부・선전부・정보부・노동부・문교부・후생부・조사부・연락부・청년부・지방부・훈련부 등을 두었다. 외무부장은 장덕수가 맡았으며, 조직부장은 김약수, 선전부장은 함상훈(咸尙勳), 정보부장은 박찬희(朴瓚熙), 노동부장은 홍성하(洪性夏), 문교부장은 김용무(金用茂), 후생부장은 이운(李雲), 조사부장은 유진희(兪鎭熙), 연락부장은 최윤동(崔允東), 청년부장은 박명환(朴明煥), 지방부장은 조헌영(趙憲泳), 훈련부장은 서상천(徐相天) 등이 맡았다. 이 밖에 김병로를 위원장으로 20인의 중앙감찰위원을 두었고, 각 도의 시도지구당 위원장도 선출했다.

한국민주당이 창당 직후인 1945년 9월 27일에 미군정청에 신고한 당원수는 5만 명이었다. 그 뒤 12월 5일 부산시당을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1946년 말까지 54개의 지구당으로 지방조직을 넓혀갔다. 당원수도 1946년 12월에는 23만 명, 1947년 12월에는 86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활동

한국민주당은 미군정기에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협조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성수(金性洙)를 비롯한 당내의 많은 사람들이 미군정청의 고문과 관리 등으로 활동했으며, 미군정청이 1946년에 입법・자문기관으로 설립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도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한국민주당은 1945년 10월 이승만이 환국한 뒤에 결성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에 참여해 중심세력으로 활동했다. 아울러 김구(金九) 등 임정 요인들의 환국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12월 1일의 임시정부 봉영회(臨時政府奉迎會)와 12월 19일의 임정 개선 환영대회 등도 주도했다.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남북한 분할 신탁통치안이 결정된 뒤에는 김구가 결성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에 참여해 반탁운동을 벌였다. 이때 당내에서 신탁통치 불가피론을 주장하던 수석총무 송진우가 12월 30일 김구 계열의 한현우(韓賢宇)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송진우가 죽은 뒤에는 장덕수가 수석총무의 지위를 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에 기초해 1946년 1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과 김구는 신탁통치를 추진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에 반대했다. 하지만 한국민주당은 한국인의 뜻을 알리려면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한다며 장덕수 주도로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것을 당론으로 내세웠다. 그해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 미군정 주도로 좌우합작이 추진되었을 때에도 좌우합작위원회에 원세훈(元世勳) 등을 대표자로 파견했으나, 당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해 6월 3일 이승만이 이른바 ‘정읍 발언’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자 이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해 10월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던 원세훈・이순탁(李順鐸)・김약수(金若水) 등 100여 명이 탈당해 내부의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이 무렵에 이르러 한국민주당은 김구를 비롯한 임정 세력과도 점차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1947년 1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친일파 처리를 위해 정이형(鄭伊衡)을 위원장으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그해 3월 13일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 초안을 상정했다. 한국민주당은 이 초안에 대해 친일파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공포와 불안을 조성할 것이라고 비판하며, 친일파 처리를 정부 수립 이후로 미루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에는 더욱 본격적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12월 2일에는 김구의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던 장덕수가 김구 계열의 박광옥(朴光玉)과 배희범(裵熙範) 등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는 한국민주당과 김구의 관계가 더욱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5・10 총선거와 재편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이 이끌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대표적인 정치세력이었다. 그래서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에도 84명의 후보를 공천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해 김도연(金度演), 김상돈(金相敦), 김상순(金相舜), 김상호(金尙浩), 김용현(金用鉉), 김재학(金載學), 김종문(金鍾文), 김종선(金鐘善), 김준연(金俊淵), 나용균(羅容均), 노일환(盧鎰煥), 박상영(朴湘永), 백관수(白寬洙), 백남채(白南採), 서상일(徐相日), 서우석(徐禹錫), 서정희(徐廷禧), 송필만(宋必滿), 윤치영(尹致暎), 이영준(李榮俊), 이정래(李晶來), 장홍염(張洪琰), 정광호(鄭光好), 조영규(曺泳珪), 조헌영(趙憲泳), 최윤동(崔允東), 한석범(韓錫範), 허정(許政), 신현모(申鉉謨) 등 29명을 당선시켰다. 선거에 참여한 정당들 가운데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55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의석수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은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안이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중심제로 바뀌고, 초대정부의 인선에서도 배제되면서 점차 이승만과 대립하였다. 아울러 윤치영(尹致暎) 등 10여 명의 의원이 탈당하며 정치적 영향력도 위축되었다. 그러자 한국민주당은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내세우며 신익희(申翼熙)의 대한국민회,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 등의 세력과 통합을 추진했다. 그리고 1949년 2월 10일 이들과 통합하면서 민주국민당으로 당명을 바꾸며 재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