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로학파

황로학파

[ 黃老學派 ]

요약 중국 전국시대와 한(漢) 나라 때에 성행했던 도가 사상의 한 유파로 노자의 사상을 기반으로 묵가, 명가, 법가 등의 사상을 흡수하여 청정무위(淸淨無爲)의 정치사상을 내세웠으며, 노자의 도(道) 개념을 발전시켜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철학적 전통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황로학파라는 명칭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황제(黄帝)와 도가 사상의 시조로 전해지는 노자(老子)를 숭앙한 데서 비롯되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중국의 시조이자 최초의 제왕으로 여겨지는 황제를 숭앙하는 황학(黃學)이 성행하였다. 황학은 노자의 학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한(漢) 초기에는 황학과 노자의 학설을 하나로 합해서 황로학(黃老學)이라고 불렀고 황로학파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황로학파의 사상은 제(齊) 나라의 교육기관이었던 직하(稷下)에서 학문을 강론했던 환연(環淵)·전변(田騈)·신도(愼到)·접자(接子) 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들은 황제와 노자의 말을 빌어서 청정무위(淸淨無爲)로 백성을 편안케 하고 어지럽히지 않아야 천하가 안정되고 잘 다스려진다고 주장했다. 한편 ≪사기(史記)≫의 한비자열전(韓非子列傳)에는 법가(法家) 사상을 대표하는 한비자(韓非子)의 형명사상(刑名思想)도 황로학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황로학파의 사상이 법가 사상의 발전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려주고 있다. 

황로학파의 사상은 한(漢) 나라의 건국 이후에 더욱 성행하였다. 진시황은 법가 사상을 기반으로 강력한 관료체제와 군사조직을 발전시켜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지만, 가혹한 형벌과 전제적인 지배 때문에 백성의 반감을 사서 진(秦) 왕조는 오래 존속하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따라서 한(漢) 나라 건국 초기에 역대 제왕들은 청정무위를 강조한 황로학파의 사상을 기반으로 국가를 다스렸다. 소하(蕭何)·조참(曹參)·급암(汲黯)·전숙(田叔) 등이 이 시기에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했다. 그러나 무제(武帝)가 유학(儒學)을 통치이념으로 확립한 뒤에 황로학파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위축되었고, 후한(後漢) 시대에는 민간을 중심으로 신앙 숭배의 요소가 강조되면서 신비화하여 종교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황로학파는 ≪노자(老子)≫와 황제의 저술로 알려진 ≪황제사경(黄帝四經)≫을 주요한 사상적 근거로 삼았다. ≪황제사경≫은 후대에 전해지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1973년 후난 성[湖南省] 창사[長沙]의 마왕두이 한묘[馬王堆漢墓]의 고분에서 발견된 <경법(經法)>, <십대경(十大經)>, <칭(稱)>, <도원(道原)> 등의 저술이 ≪황제사경≫의 실전(實傳)으로 여겨지며, 이 기록들이 오늘날 황로학파 사상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황로학파는 음양(陰陽) 사상뿐 아니라, 묵가(墨家)·명가(名家)·유가(儒家)·법가(法家) 사상의 장점을 폭넓게 흡수하여 노장사상과는 다른 도가 사상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노자의 도(道) 개념을 발전시켜 자연을 일정한 법칙과 규칙들로 이해하려 했으며, 도(道)를 물질적인 기(氣)의 개념으로 파악하여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철학적 전통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나아가 우주 만물과 인간·국가가 동일한 이치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고, 청정무위의 도(道)로 수신(修身)과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모두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가의 예치(禮治)와 법가의 법치(法治), 명가의 형명설(刑名說)을 종합한 정치사상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황로학파의 무위정치의 이론은 법가와 유가 사상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참조항목

노자, 도교,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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