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총관부

탐라총관부

[ 耽羅摠管府 ]

요약 고려 시대 원(元) 간섭기에 원이 제주도를 직접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

제주도는 (元)의 남송 혹은 일본에 대한 전진 기지로서 일찍부터 원에게 주목되었다. 또한 목마장의 설치에 의하여 그 경제적 이점이 부각되자 원 간섭기에는 직접 관할 지역이 되었다. 원은 원종 14년(1273) 삼별초를 평정한 직후 제주도에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설치하였다가 곧이어 이를 탐라국군민도달로화적총관부(耽羅國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로 개편하였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탐라총관부인데 그 개편시기는 충렬왕 원년(1275) 경이다.

총관부의 장관인 다루가치[달로화적 達魯花赤]에는 몽고족의 인물이 파견되었지만 그 휘하 관원에는 제주의 토착 세력이 임명되어 원의 지배를 방조하였다. 탐라총관부는 제주도를 장악하며 조선용 목재를 징발하고 말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목마장을 다수 개발하였다. 원의 목마장은 충렬왕 2년 총관부의 다루가치 탑자적(塔刺赤)이 몽고말 160필을 서귀포시(구 남제주군) 성산읍의 수산평에 방목함으로써 처음 만들어졌으며 이후 확산되었다.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10년(1284) 탐라국안무사(耽羅國安撫司)로 개칭되었다가 충렬왕 26년(1300)에 다시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충렬왕 27년 이를 탐라군민만호부(탐라만호부)로 개편하여 공민왕 5년(1356)에 폐쇄될 때까지 지속 되었다.

탐라총관부와 관련하여 원은 제주도에 1천 명 이상의 군사를 유지하고 있었다. 삼별초를 공격할 당시 초기 7백 명의 원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충렬왕 8년에는 일본침략을 대비하여 1천 4백의 병력을 제주도에 증파하였다. 그 중 일부는 철수하였지만 대략 1천 5백명에 가까운 병력이 주둔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때에 탐라만호부가 폐지되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탐라총관부의 설치로 제주에 토착하게 된 몽고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한동안 불식되지 않았으며 반고려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공민왕 23년(1374) 제주 목호(牧胡)의 난(亂)이 그 예이다.

탐라총관부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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