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

츠빙글리

요약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로 일하며 체계적인 성경강해로 명성을 날렸다. 루터의 영향으로 취리히의 종교개혁에 나섰다. 가톨릭을 고수하는 주(州)들과의 전투에 종군목사로 참전했다가 카펠 전투에서 전사했다.
츠빙글리

츠빙글리

원어명 Ulrich Zwingli
출생-사망 1484.1.1 ~ 1531.10.11
국적 스위스
활동분야 종교

1484년 1월 1일 스위스 토겐부르크(Toggenburg)  지방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마을 행정관이었으며 8남 2녀 중 3째였다. 1500년 빈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502년 바젤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을 공부하면서, 인문주의적 교양을 쌓았으며, 인문학자 비텐바흐(Thomas Wyttenbach 1472~1526)를 추종하였다. 1506년 9월 16일 사제 서품을 받고 10년간 글라루스에 있는 교회의 신부로 있는 동안 세 차례나 종군목사로 종군하였다가 1515년 용병제도를 비판하며 군종 신부를 사임하였다. 이후  아인지델른(Einsiedeln)으로 옮겨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1519년 취리히의 대성당의 설교자가 되어, 체계적인 성경강해를 하여 시민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는 성추문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로스뮌스터 주교좌 성당의 유급사제로 영입되었다. 이 무렵부터 츠빙글리는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여 설교하는 설교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1522년 츠빙글리는 단식계율(斷食戒律)을 어기고 친구들과 만찬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취리히 교구의 경고를 받았다. 츠빙글리는 성서에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친구들을 변호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종교개혁적 사상을 외부에 표현한 최초의 글이었다.

1522년 츠빙글리는 세자녀를 둔 과부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를 가진 10명의 사제들과 함께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청혼서를 주교에게 제출하였다. 그는 성서에 합치되는 내용을 주장하면서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시 당국이 기획한 토론회에서 <67제안(提案)>를 발표하여, 시 당국을 설득시켜 종교개혁에 호응하도록 하였으며, 또 제2회 토론회에서는 성화상(聖畵像) 폐지에서 십자가 ·제단 ·오르간의 폐지까지 제의하였다. 이 운동의 영향은 취리히는 물론, 그 밖의 도시에까지 번지는 동시에, 가톨릭교를 고수하는 주(州)의 반발도 커서 독일의 루터파(派)와 제휴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1529년의 마르부르크회담에서, 성찬(聖餐)에서의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와 몸의 상징으로 해석하여, 이른바 ‘상징론’을 주장함으로써 루터와 의견이 대립된 때문에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가톨릭교를 견지하는 원시(原始) 5주(州)와의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취리히군의 종군목자로 참전하여, 카펠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에는 스위스의 종교개혁 운동은 당분간 J.H.불링거에게로, 그 다음에는J.칼뱅에게로 넘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