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운

정경운

[ 鄭慶雲 ]

요약 임진왜란 때 경상도 지역의 왜적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조선 중기 학자 겸 의병장. 저술로는 《고대일록(孤臺日錄)》 등 임진왜란 때 의병의 사적을 기록한 여러 저술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출생-사망 1556 ~ ?
본관 진주(晉州)
덕옹(德顒)
고대(孤臺)
활동분야 문학, 군사
주요저서 《고대일록(孤臺日錄)》

본관은 진양(晋陽), 는 덕옹(德顒), 는 고대(孤臺)이다. 경남 함양(咸陽)에서 승문원(承文院) 부정(副正)을 지낸 정율(鄭栗)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정인홍(鄭仁弘)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주변에 절승(絶勝)을 이룬 소고대(小孤臺)가 있어서 ‘고대’라 자호하였다. 청년기에 함양의 탁영서실(濯纓書室)에서 학문을 닦고, 26세 때 정인홍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이때 함께 교유한 인물은 박여량(朴汝樑) ·노사상(盧士尙) ·오장(吳長) 등이다. 정인홍의 《내암집(來庵集)》에 정경운의 시가 12수 남아 있을 정도로 정인홍과의 관계는 친밀하였지만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사상 등과 함께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1천여 의병을 모집, 김성일(金誠一) ·김면(金沔)의 휘하에서 활약하면서 군량보급과 군기조달에 주력하여 경상도 지역의 왜적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597년의 정유재란 때는 남계서원(藍溪書院)이 병화로 소실되자 이 서원의 유사(有司)로서 정여창(鄭汝昌) 등의 위패를 모셔두었다가 뒤에 위패를 다시 봉안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1617년에는 남계서원의 원장에 올랐다. 저술로는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고대일록(孤臺日錄)》과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등이 있다. 특히 《고대일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1609년까지 초유사 김성일의 소모유사, 의병장 김면의 소모종사관 등을 지내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과 전후 수습대책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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