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후원분

전방후원분

[ 前方後圓墳 ]

요약 원형(圓形)의 분구에 직사각형 또는 사각형 분구를 붙여놓은 평면형을 나타내는 무덤이다.

전방후원분은 고대 무덤 형태의 하나로, 둥그론 무덤(圓墳)과 네모난 무덤(方墳:고구려 고분에 많음, 서울 석촌동 고분)의 형태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고분으로, 앞부분은 네모나고(前方) 뒷부분은 둥그런(後圓) 형태로 열쇠구멍 모양을 띈다. 대체로 후원 부분이 사체를 매장한 분묘 부분이고 앞의 네모난 부분은 제단(제단)의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초기에 네모난 무덤(方墳)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후에 중국 양쯔강 유역과 산뚱반도에서 성행한 토돈묘(土墩墓)와 방문, 원분의 요소가 전해져 두 요소가 결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중부지방 한강 유역에 전해진 후, 해안지방을 따라 남하하여 영산강 유역과 후에 낙동강 유역과 경주 지방에까지 전해졌다.

무덤의 형태는 여러 모양이 있어,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쌍방중원분(雙方中圓墳), 전방후방분(前方後方墳), 변형으로써 전후원분(前圓後圓墳) 모양을 갖는 것 등이 있다. 전라남도 나주군 신촌리 6호분과 같이 전방부에 옹관을 매장하고 후원부에 토장을 한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6.7호분, 송파구 방이동 1.2호분과,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무안군 몽탄면, 영암군 시종면, 해남군 장고산 등지에서 발견되고,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군 고성읍 송학동 1호분, 함안군 가야읍 말이산, 거창군 거창읍 동부동,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성주군 성주읍, 의성군 금성면, 상주군 함창읍, 대구 불로동, 경주시 구정동 등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3세기에 한강 유역에서 발생하여 4~5세기에 성행하였고, 5세기 말에는 한반도에서 소멸한 것으로 관찰된다. 대부분의 전방후원분들이 오래되었고 방치되어 그 원형을 쉽게 알아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리나라 남방의 전방후원분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에서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일본에서는 4세기까지는 우리 나라와 같이 산상이나 구릉에 많이 만들었으나, 5세기 이후에는 평야지대로 옮겨와 크게 발달하였다. 규모도 매우 웅장하고 크며(길이가 수백미터에 이르기도 함) 주위에 도랑이나 연못을 파서 주호(周濠, 또는 周湟)를 만들어 보호하기도 하였다. 일본에는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전지역에 분포하며, 특히 일본의 기내(畿內) 지방에서 발달하였다. 5~6세기에 발달하였다가 6세기 말~7세기 초에 쇠퇴하다가 8세기에는 소멸하였다. 후원부는 높게 만들고 전방부는 낮게 조성하는 것이 보통이며, 규모나 부장품이 매우 독특하여 지배층 인물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장품으로는 원통형, 집모양, 그릇형, 동물형, 인물형 등의 토기 또는 토용(土俑 하니와 埴輪)을 둘러 매장하기도 하였다. 전방후원분이란 명칭은 1808년 일본의 국학자인 가모(浦生君平)씨가 그의 저서인 산릉지(山陵志)에서 처음 사용한 후 학술용어로 정착되었다.

전방후원분의 기원설이 분분하나, 일본에는 완성분만이 있고 그 시원분은 없다. 한국에는 시원분이 주류를 이룬다. 보다 발달되고 완성된 형태의 유물 유적이 많음이 반드시 발생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