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위종

이위종

[ 李瑋鍾 ]

요약 한말의 외교관·독립운동가. 1907년 고종의 밀령으로, 이준·이상설과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좌절되자, 만국기자협회에서 일본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출생-사망 1887 ~ ?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정치외교, 독립운동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본관 전주(全州) 이씨이다. 주 러시아공사를 지낸 이범진(李範晉)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7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각국을 순회하여,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에 능통하였다. 1896년 부친이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워싱턴으로 갔으며 1899년 부친이 다시 주 프랑스 공사관으로 임명되자 공사관 서기생으로 일했다. 1901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을 지냈으며 러시아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러시아공사관이 폐쇄된 후에도 부친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에 남아 외교적 활동을 전개했다.

1907년 고종의 밀령을 받고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부친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황제 짜르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위종은 이들과 함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갔다.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만국기자협회를 통하여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일본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공박,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였다. 이에 일본은 이들 3인에 대한 궐석재판(闕席裁判)을 열어 종신형을 선고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현지에서 울분으로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 시립공동묘지에 안장하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그 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최재형(崔在亨), 이범윤(李範允) 등과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 군사작전을 펼쳤지만 일본을 의식한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부친 이범진의 자결로 받은 충격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으며 러시아 시민이되어 혁명에 가담하였고 혁명군과 연대하여 조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후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위종 연보
출생 1887~

1887

서울에서 출생.

1896

아관파천 직후 부친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감.

1905

러시아 여성 놀켄과 결혼.

1907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평화회의 특사로 파견 됨.
8월, 헤이그평화회의 참석에 실패한 뒤 미국으로 건너감.

1911

신한촌에 설립된 권업회에 참여하는 등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펼침.

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


역참조항목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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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동영상

헤이그특사 이위종, 세계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