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송

이여송

[ 李如松 ]

요약 중국 명(明)의 장수(將帥)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명(明)의 2차 원병(援兵)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출생-사망 1549 ~ 1598
자무(子茂)
앙성(仰城)
시호 충렬(忠烈)
국적 중국 명(明)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톄링[鐵嶺]

자(字)는 자무(子茂), 호(號)는 앙성(仰城)이며 철령(鐵嶺, 지금의 遼寧省 鐵嶺) 출신이다. 조선(朝鮮) 출신인 이영(李英)의 후손(後孫)이며, 요동총병(遼東総兵)으로 랴오둥[遼東] 지역의 방위에 큰 공을 세운 이성량(李成梁, 1526~1615)의 장자(長子)이다. 철령위(鐵嶺衛) 지휘동지(指揮同知)의 직위(職位)를 세습하였다가, 1583년(萬曆 11년) 산시총병관[山西總兵官)이 되었다. 1592년(萬曆 20년), 간쑤성[甘肅省] 닝샤[寧夏]에서 발배(哱拜)의 난이 일어나자 제독(提督)으로 토벌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동생인 이여장(李如樟)과 함께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도독(都督)으로 승진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 임명되어 조선(朝鮮)으로 파병되었다.

43000여의 명군(明軍)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이여송(李如松)은 휴정(休靜, 1520~1604), 김응서(金應瑞, 1564~1624) 등이 이끄는 조선(朝鮮)의 승군(僧軍), 관군(官軍)과 연합하여 1593년 1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倭軍)을 기습해 평양성(平壌城)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며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黄海道), 개성(開城) 일대를 탈환(奪還)했지만, 한성(漢城, 지금의 서울) 부근의 벽제관(碧蹄館)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이 이끄는 왜군에 패하여 개성(開城)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함경도(咸鏡道)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이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말이 떠돌자 평양성(平壌城)으로 물러났다. 그 뒤에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화의(和議) 교섭(交涉)에만 주력하다가 그 해 말에 유정(劉綎, 1558~1619)의 부대만 남기고 명(明)으로 철군(撤軍)하였다.

명(明)으로 귀국한 뒤에 이여송은 태자(太子) 태보(太保),중군도독부(中軍都督府) 좌도독(左都督) 등을 역임하였으며, 1597년(萬曆 25년)에는 요동총병(遼東総兵)이 되었다. 1598년 4월, 타타르[韃靼]의 토만(土蠻)이 랴오둥[遼東]을 침공하자 이여송은 4000여의 경기병(輕騎兵)만을 이끌고 정벌에 나섰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 영원백(寧遠伯)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충렬(忠烈)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동생인 이여매(李如梅)가 요동총병(遼東總兵)의 직위가 승계되었다. 

이여송의 후손들은 랴오닝성[遼寧省]에서 철령(鐵嶺) 이씨(李氏)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며 살아왔다고 전해지며, 그의 후손 가운데 일부는 명(明)이 멸망한 뒤 조선(朝鮮)으로 피신하여 농서(隴西) 이씨(李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여송의 가계(家系)는 성주(星州) 이씨(李氏)에서 갈라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