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자리

이부자리

요약 잠잘 때 몸을 덮어서 보온하는 이불.
단받이와 이부자리

단받이와 이부자리

이부자리란 이불[衾]과 요[褥]를 말하고, 이부자리와 베개[枕]를 합쳐서 금침(衾枕)이라 한다. 이불은 침구 중의 필수품으로, 《고려도경(高麗圖經)》 제29에 수침(繡枕)·침의(寢衣)라는 말이 있고, 조선시대의 〈금침발기〉의 이불과 베개에 관한 기록에서 역사적 내력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 고분에서 출토된 베개와 고려시대의 베개, 임진왜란 때 옥사한 김덕령(金德齡) 장군 묘에서 나온 이불을 보면 오늘날의 것과 비슷하여, 예로부터 금침은 큰 변화 없이 전승되어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의 침구는 색채와 천이 호화로웠는데, 그 품목을 적은 발기는 궁중에 근 1,000여 점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일품(逸品)은 순종황제 가례(嘉禮) 때의 《금(衾)발기》이다. 이것은 홍색·초록색·황색·남색·분홍 등 5색의 중국산 잠련지(撏鍊紙)를 이어 만든 것으로, 아름다운 궁체(宮體)로 써 내려간 문서(文書)이다. 또 명성황후가 세자 순종을 위해 사상 초유의 호화로운 결혼식을 마련했던 임오년(壬午年) 가례에는 별궁용까지 합해 혼수이불이 무려 560채나 되었는데, 솜이불·누비이불·겹이불·천의(처네) 등이었다. 누비이불에는 오목누비·중(中)누비·세(細)누비의 3종류가 있고, 천의도 솜과 누비의 2종류였다. 색채도 남색·초록·분홍·보라 등 각색이며, 궁중이불은 왕이 거처하는 방이 따뜻하기 때문에 솜을 얇게 두었고, 추울 때는 이불 위에 천의를 포개 덮었다.

홑이불 시치는 법과 '흰 동정'을 다는 점이 백성과 다른데, 왕의 이불은 홑이불이 거죽으로 넘어오지 않게 시치고, 이불 깃 위에는 흰색의 같은 비단으로 동정을 단다. 천의는 홑이불을 시치지 않고 동정만 시친다. 욧잇은 넘어가도록 시치나 민간의 것과 같이 넓지 않았다. 겨울용으로 도류단(桃榴緞), 가을용으로 명주류, 여름용으로 항라(亢羅)와 같은 얇고 까슬까슬한 천이 쓰였다. 왕의 침구가 이처럼 호화롭고 특별했던 데 비해 평민의 것은 자료나 기록에 취급되지 않아 고증(考證)하기 어렵다. 침구를 유산이나 가보로 남기는 풍습은 거의 없어 실물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이불은 광주 충장사(忠壯祠)에 보관되어 있는 김덕령 장군 묘에서 나온 부장품(副葬品)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것이다. 이부자리는 착포단(著布團)인 금(衾)과 부포단(敷布團)인 요(褥)를 말하는데, 춘추용과 동·하절용 등 계절별로 구분되어 사용되며, 솜을 넣어 만들었다. 착포단에는 후포단(厚布團)·박포단(薄布團)·자포단(刺布團:자수포단)·겹포단[袷布團]·홑포단[單布團]·경포단(輕布團)·누비이불 등이 있다.

오늘날의 침구는 휴식에 대한 중요성을 높이 인식하여, 안락감·위생·보온과 청량감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재료와 모양이 다양해졌다. 실내장식면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으며, 재래식 이부자리 외에 침대용의 것이 병용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혼수용 이불은 관습상 보통 3채·5채·7채와 같이 홀수로 준비하고, 남색·연두·자주를 많이 쓴다. 겨울용 솜이불, 솜을 조금 넣은 차렵이불·누비이불·겹이불·홑이불(여름용) 등을 마련하고 깃을 이불색에 맞추어 홍색과 남색, 자주와 연두, 연두와 홍색 등으로 배색하여 달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깃을 달지 않는 경우도 많고, 목화솜 대신 화학솜·풀솜을 두기도 한다.

화학솜은 목화솜에 비해 흡습성이 작고 열에 약하나, 촉감·탄력이 좋고 가벼워서 요보다는 이불에 많이 사용한다. 이불 겉감으로는 양단·명주·삼팔주(三八紬)·산동주·마미단(麻美緞)·나사류·모본단(模本緞) 등을 쓰고, 안감은 대개 면으로 한다. 빛깔은 남녀용을 구별하는데, 남자용에는 감색이나 검정 등 침착한 색상에 자주와 홍색으로 배색하고, 여성용은 좀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상인 초록 몸판에 다홍과 분홍으로 배색하며, 동정은 남녀 모두 흰색이다. 솜은 두꺼운 이불의 경우 보통 15∼20근, 경포단의 경우 4∼7근을 넣고, 안감은 남녀 모두 흰색을 쓴다.

참조항목

견주

역참조항목

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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