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경

윤지경

[ 尹知敬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광해군대에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폐모론에는 반대하여 1623년의 인조반정 이후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인조대에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후금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척화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출생-사망 1584 ~ 1634
본관 파평(坡平)
유일(幼一)
창주(滄洲)
활동분야 정치

본관 파평(坡平). 자 유일(幼一). 호 창주(滄洲). 도승지 담무(覃戊)의 아들로, 1603년(선조 36)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후 수찬(修撰) ·필선(弼善) ·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대에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폐모론(廢母論)에는 반대하여 1623년의 인조반정 이후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인조대에 응교(應敎) ·집의(執義) ·사간 ·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후금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척화론(斥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후금이 화친을 논의할 때 생원 윤형지(尹衡志)가 상소를 올려 화친의 주창자들을 공격하자 윤황(尹煌)과 함께 이를 적극 지지하여, 공론(公論)에서는 이들을 지목하여 ‘삼윤(三尹)의 정기(正氣)’라고 평하였다. 조경(趙絅)이 비명(碑銘)을 썼다.

참조항목

윤황, 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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