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2세

유스티니아누스 2세

[ Justinianus II ]

요약 7세기 비잔티움제국을 지배한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695년 반란으로 코를 잘린 채 추방되었으나 불가리아 제국의 도움으로 다시 황위에 올랐다. 하지만 잔혹한 통치로 다시 반란이 일어나 살해되었다. (재위 685~695, 705~711)
출생-사망 669 ~ 711
국적/왕조 헤라클리우스 왕조
재위기간 685년 ~ 695년, 705년 ~ 711년
별칭 유스티니아누스 리노트메토스(Justinianus Rinotmetos)
활동분야 정치

7세기에 동로마제국(Eastern Roman Empire)이라고도 불리는 비잔티움제국(Byzantium Empire)을 지배한 헤라클리우스 왕조(Heraclian Dynasty)의 마지막 황제이다. 영어로는 유스티니안 2세(Justinian II)라고 부르며, 685년부터 695년까지 황위에 있다가 반란으로 쫓겨났다가 705년 다시 황제가 되어 711년 다시 반란으로 쫓겨날 때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 있었다. 695년 반란으로 추방될 때 코가 잘렸기 때문에 ‘잘린 코 유스티니아누스’라는 뜻의 ‘유스티니아누스 리노트메토스(Justinianus Rinotmetos)’라고도 불린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콘스탄티누스 4세(Constantinus IV, 재위 668∼685)와 아나스타시아(Anastasia, 650~711)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685년 콘스탄티누스 4세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16세의 나이에 비잔티움 제국의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688년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1∼750)의 5대 칼리프(Caliph)인 압둘 말리크(Abd al-Malik ibn Marwan, 재위 685~705)와 키프로스(Cyprus), 아르메니아(Armenia) 등을 공유하는 내용의 화약(和約)을 맺었다. 그리고 688~689년에 트라키아(Thracia)와 마케도니아(Macedonia)를 원정하여 발칸반도에서의 세력 확장을 꾀했으며, 포로로 잡은 슬라브인(Slavs)과 레바논(Lebanon)의 산지에 거주하던 마론파(Maronites) 기독교인을 소아시아 남부로 이주시켜 이 지역의 방위 체제를 정비하였다.

691년에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지금의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트룰로(Trullo) 궁에서 교회회의를 열었다. 개최지의 명칭을 따서 트룰로 공의회(Council in Trullo)라고도 불리는 퀴니섹스트 공의회(Quinisext Council)는 69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553년과 680년에 열린 제2차와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uncil of Constantinople)의 내용을 법령으로 공포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는 고대 그리스적인 신앙이나 관습을 금지하고, 성모와 순교자 등의 초상인 이콘(Icon, 聖畵) 숭배를 승인하는 등 102개의 교회법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상당수가 로마 교회의 관행과 대립되어 로마 교황 세르기우스 1세(Sergius I, 재위 687~701)는 이를 거부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교황을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하려 했지만, 로마 시민들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691년 이슬람제국은 소아시아 지역을 다시 침공해왔다. 소아시아로 이주했던 슬라브인들이 이슬람제국의 편에 서면서 비잔티움제국은 692년 세바스토폴리스(Sebastpolis, 지금의 Sukhumi)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슬람군에 크게 패했고, 아르메니아를 빼앗겼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잦은 원정과 이슬람제국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으며, 재정을 담당한 관리들은 무자비한 착취를 일삼아 백성의 불만을 샀다. 마침내 695년 헤라스(Hellas) 군관구(軍管區, Thema)의 스트라테고스(strategos)로 있던 레온티우스(Leontius, 재위 695~698)가 반란을 일으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코를 잘린 채 크리미아(Crimea)의 헤르손(Cherson)으로 유배되었다. 고대 로마제국부터 신체의 이상이 없어야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불문율로 전해져, 폐위된 황제는 다시 제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귀나 혀, 코 등을 잘라 추방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하지만 헤르손으로 추방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황금으로 코를 만들어 달고 공공연히 복위를 추진했다. 698년 레온티우스는 게르만족 출신의 티베리우스 3세(Tiberius III, 재위 698~705)에게 마찬가지로 코가 잘린 채 쫓겨났다. 티베리우스 3세는 헤르손에 추방되어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죽이려 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703년 헤르손을 벗어나 투르크계의 하자르(Khazars) 한국(汗國)으로 탈출했다. 그곳에서 칸(可汗)의 누이와 결혼해 테오도라(Theodora)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시 흑해를 건너 불가리아 제국(Bulgarian Empire, 632~1018)으로 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테르벨(Tervel, 재위 700~721) 왕의 지원을 받았다. 705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불가르인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다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레온티우스와 티베리우스 3세 등을 처형하고 공포 정치를 펼쳤다. 그는 테오도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티베리우스(Tiberius, 재위 706~711)를 공동 황제(Augustus)로 임명했으며, 불가리아 제국의 칸인 테르벨(Tervel)를 부황제로 삼았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랑고바르드(Langobard) 왕국이나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해 711년에는 로마 교황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재위 708~715)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심이 많아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처형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그는 709년 자신에 저항하던 라벤나(Ravenna)로 함대를 파견해 약탈을 저질렀으며, 711년에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헤르손에도 함대를 보내 약탈하였다. 분노한 헤르손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필리피쿠스(Philippicus, 재위 711~713)를 황제로 세우고 하자르족(Khazars)과 연합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왔다. 콘스탄티노플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반란군에 점령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소아시아의 시노프(Sinop)로 도주했다가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아들인 티베리우스도 처형되어 헤라클리우스 왕조는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