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춘

유계춘

[ 柳繼春 ]

요약 1862년 일어난 대대적인 농민항쟁인 진주민란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출생-사망 ? ~ 1862

경상남도 진주 원당면(元堂面) 원당촌(元堂村) 출생. 아버지 유지덕이 일찍 죽은 뒤 어머니 정씨 밑에서 성장하였다. 35세 때(1850년경) 외가가 있는 유곡면(杻谷面) 내평촌(內坪村)으로 이사하였다. 유곡으로 이사한 때는 마침 환곡(還穀), 포흠(逋欠) 등의 문제가 심각한 때였다. 그는 마을의 여론을 주도하기 시작하였고 각종 폐단을 과감하게 지적하였다. 나아가 집회를 열어 농민들의 여론을 모아 읍과 감영에 등소를 보냈다. 그러나 별 진전없는 관의 조치는 폐해를 누적시킴으로써 1862년 대대적인 농민항쟁인 진주민란을 일어나게 하였다.

진주민란은 유계춘이 유곡으로 이사한 지 약 10년 만에 일어났으며,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그는 이계열 등과 함께 진주민란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도결(都結)과 환곡의 폐단을 타파하기 위해 2월 6일 수곡(水谷) 장터로 모이라는 통문을 만들어 각 마을과 읍내 곳곳에 붙였다. 2월 6일 여러 마을 농민들이 참여한 도회(都會)에서 유계춘은 관아에 들어가 시위를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으므로 의송(議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관에서는 유계춘을 주도자로 지목하고 잡아들였다.

유계춘이 체포된 뒤, 농민들이 땔나무를 베기 위해 조직한 초군(樵軍)들이 집회에 참여하면서 진주의 분위기는 시위를 하자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들은 유계춘이 2월 13일 제사가 있다는 구실을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2월 14~20일 철시(撤市)와 훼가(毁家)를 시위 형태로 하는 대대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유계춘은 민란이 수습된 뒤, 김수만(金守萬) ·이귀재(李貴才) 등과 함께 효수되었다.

조선정부는 진주민란을 수습하면서 유계춘에 대해 “토지가 없는 처지라서 별로 피해를 입지 않았을텐데 왜 앞장서는지 알 수 없다”면서, 그가 일을 꾸미기 좋아한다든가 이를 기회로 한몫 보려 했다는 식으로 몰아붙였다. 지배층은 토지조차 갖지 못한 빈한한 생활이 사회모순에서 비롯되었고, 그러한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유계춘이 앞장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참조항목

이명윤, 진주민란

역참조항목

유계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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