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 전투

워털루 전투

[ Battle of Waterloo ]

요약 1815년 6월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 1세가 이끈 프랑스군이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Waterloo)에서 벌인 전투로, 프랑스군이 패배하여 나폴레옹 1세의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워털루 전투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I, 1769~1821)이 이끈 프랑스군은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이후 각 지역의 민족주의적 반란에 부닥쳤다. 그리고 마침내 1814년에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에게 파리를 점령당했다. 나폴레옹은 퇴위되어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Elva Island)로 유배되었다(1814.5.4). 그리고 루이 16세(Louis XVI,1754~1793) 의 동생인 루이 18세(Louis XVIII,1755~1824)가 황제로 즉위하여 왕정이 복고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시민들은 무능한 루이 18세에 실망하였고 나폴레옹을 다시 옹립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1815년 2월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칸느(Cannes)에 상륙하였고 충직한 부하 1000여 명과 함께 파리로 북상하였다. 루이 18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관군을 보내 진압하게 하였다. 하지만 관군은 오히려 나폴레옹에 합세하였다. 루이 18세의 왕정은 영국으로 도망가고 나폴레옹은 공화주의자와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20여일만에 파리에 입성해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당시 각국은 나폴레옹을 타도하기로 협약되었고 그들 동맹국의 병사는 70만명을 넘었다. 나폴레옹은 초전에 이들을 각개격파하면 정치적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관계가 와해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 해 6월, 나폴레옹은 12만 5000명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1852)이 지휘하는 약 9만 5000명의 영국군과 블뤼허(Bluecher, 1742~1819)가 지휘하는 약 12만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기로 결심했다. 벨기에 남동쪽 워털루(Waterloo) 남방 교외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전투가 워털루 전투 (Battle of Waterloo)이다. 6월 16일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해 퇴각시키고, 6월 18일 워털루에서 영국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기우는 듯했지만, 퇴각했던 블뤼허의 프로이센군 6만 명이 다시 기습을 하여 전세가 역전되었다. 프랑스군은 결국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영국군의 공세에 의해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프랑스군의 전사자는 4만 명에 이르렀으며, 영국군 전사자는 1만 5000명, 프로이센군은 7000명 가량이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6월 22일 영국군함 벨레로폰(Bellerophon)호에 실려 대서양의 외딴 섬인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 Island)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영국군의 감시를 받으며 울분의 나날을 보내다 1821년 5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나폴레옹의 재집권은 백일천하로 끝났고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23년에 걸친 오랜 전쟁도 끝이 났다.

나폴레옹의 퇴진 이후 프랑스는 다시 부르봉 왕가(Hause of Bourbon)의 왕정으로 돌아갔으며, 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도피하였던 망명 귀족들이 다시 돌아와 잃었던 특권을 회복하였다. 승리한 연합국들은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서 유럽을 재편하기 위한 회의를 하였다. 메테르니히(Metternich, 1773~1859)가 주도한 빈 회의의 성격은 반동 복고적이었다. 각국의 절대왕정은 군대와 비밀경찰, 검열 제도를 강화하여 프랑스혁명으로부터 확산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억압하려 했다.

한편 워털루 전투는 군사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전투의 정황과 관련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라는 비극성과 마지막의 묘한 반전 때문이다.

워털루 전투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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