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2세

앙리 2세

[ Henri II ]

요약 프랑스의 왕(재위 1547∼1559). 독일·영국 등으로부터 잃은 땅을 회복하고 국내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기 위해 에스파냐와 카토캉브레지화약을 맺었다. 프랑스 르네상스 문화를 장려하였고 종교개혁 운동에 대해서는 엄하게 경계하였다.
앙리 2세

앙리 2세

출생-사망 1519.3.31 ~ 1559.7.10
국적/왕조 프랑스
재위기간 1547년∼1559년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프랑스 생제르맹앙레

1519년 파리 근처 생제르맹앙레에서 프랑스왕국의 왕인 프랑수아 1세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형이자 왕세자인 프랑수아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스페인 카를5세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스페인 감옥에 감금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형과 함께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에서 인질 생활을 하였다가 석방되었으며 강직하고 기사의 풍모를 지녔다. 

1533년 이탈리아의 명문 메디치가(家)에서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와 정략결혼하였고, 이 결혼으로 교황과 함께 스페인 카를 5세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실제 그의 연인은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라는 20세 연상의 귀부인이었으며 그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부왕 때부터의 잦은 전쟁과 주변국과의 부침으로 외교정책에 밝았으며 독일황제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필리프 2세와의 싸움을 계속하여 라인 지방 및 이탈리아 북부에 영토를 확장하였다. 1552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샹보르조약을 맺고 병력과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가로 메스·툴·베르됭을 확보하고, 1558년 영국·에스파냐으로부터 칼레를 탈환하여 잃은 땅을 회복하였다. 1559년 국내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기 위하여 에스파냐와 카토캉브레지화약을 맺었다.

국내에서는 종교개혁 운동에 대해서는 신교도를 탄압하고 종교재판소를 설치하는 등 엄하게 경계하였다. 그러나 국내정치는 20세 연상의 정부 디 안 드 푸아티에와 총신 기즈 공(公) 등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출신의 카트린의 영향으로 프랑스 르네상스문화가 기반을 내렸으며 건축과 음식, 예절 등에 발전을 이루었다. 카트린과 사이에서 10남매를 두었으며 프랑수와 2세, 샤를 9세, 앙리 3세가 왕위에 올랐다. 1559년 7월 신하인 몽고메리 백작과의 마상시합에서 눈에 창을 맞고, 10일 뒤에 파리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