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경

안진경

[ 顔眞卿 ]

요약 중국 당(唐)나라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균제미(均齊美)를 충분히 발휘한 글씨로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했다. 해서·행서·초서의 각 서체에 모두 능했고 많은 걸작을 남겼다.
출생-사망 709 ~ 785
별칭 안노공, 자 청신
국적 중국 당나라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중국 산둥성 낭야 임기

자 청신(淸臣)이며 산둥성[山東省] 낭야(琅邪) 임기(臨沂)에서 출생하였다.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렸다. 북제(北齊)의 학자이며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저술한 안지추(顔之推)의 5대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출세길에 올랐으나 재상 양국충(楊國忠)의 미움을 받아 한직인 평원태수(平原太守)로 좌천되었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때 그는 상산군 태수였던 사촌형 안고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안고경은 안녹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으며 안진경은 불리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당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숙종(肅宗)에게 발탁되어 수도 장안(長安)에서 헌부상서(憲部尙書)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세도가 였던 환관(宦官)과 권신(權臣)들에게 잘못 보여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4년 숙종, 대종(代宗)에 이어 즉위한 덕종(德宗)의 명으로 회서(淮西)의 반란군 장수인 이희열(李希烈)을 설득하러 갔다가 3년간 감금당하였고, 끝내 살해되고 말았다.

그의 글씨는 남조(南朝) 이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王羲之)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체와는 달리 남성적인 기백이 넘쳤으며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큰 영향을 끼쳤다. 해서·행서·초서의 각 서체에 모두 능하였으며, 많은 걸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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