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싸움

안시성싸움

[ 安市城─ ]

요약 645년(고구려 보장왕 4) 안시성에서 고구려와 당나라 군대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과정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과정

안시성은 당시 인구 약 10만에 이르던 고구려의 영지로,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이다. 643년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라는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차후 신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불응하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류왕(榮留王) 살해 및 대신(大臣) 학살사건의 문책을 표방하고 644년 11월 당 태종 친솔(親率)의 10만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이듬해 4월부터 개모성(蓋牟城:瀋陽 동남쪽) ·비사성(卑沙城) ·랴오양[遼陽] ·백암성(白巖城)을 차례로 점령한 당군은 6월에는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을 대장으로 한 15만의 군사를 안시성에 보냈다. 많은 군사에 당 태종은 두려워하며 기만 전술을 펼쳤다. '당은 교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을 시해한 신하를 문죄하는 것이므로 고구려가 신하의 예를 다하면 잃은 땅도 회복될 것'이라고 두 사람을 기만하였다. 고연수가 이 말을 믿고 있다가 공격해 온 당나라 군에 대패하여 3만여 명이 전사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이세적(李世勣)을 시켜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휘하 장수 도종(道宗)은 먼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 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올려 점점 성높이와 같게 하였으나 성 안에서도 이에 따라 성을 높여 막았다. 당군은 하루에 6∼7차례 충거(衝車 :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攻城器) ·포거(抛車:돌을 날리는 공성기) 등을 동원, 성을 파괴하면 성 안에서는 곧 목책을 세워 이를 보완하였다.

이에 도종은 연인원 50만을 동원하여 60일에 걸쳐 안시성보다 훨씬 높은 토산을 쌓는 데 성공하였다. 당군은 부복애(傅伏愛)를 대장으로 하는 부대에게 토산의 정상에 올라 수비하게 했으나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며 성에서 고구려군이 쏟아져 나와 토산을 탈취하여 당군은 토산의 탈환전을 3일 동안 계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싸움은 날마다 6∼7회의 가열(苛烈)한 공방전이 계속되어 당군이 안시성을 포위한 지 3개월이 지났으나 요지부동, 고구려군의 용맹성에는 당태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9월에 이르러 기후는 이미 한랭하기 시작하고 병마(兵馬)의 양식도 떨어져 당태종은 할 수 없이 철군하기로 결정하였다. 당군이 철군을 시작하자 안시성의 성주가 성 위에 올라 당태종을 비록 바라보고 송별의 예(禮)를 표하자 당태종은 적(敵)일지라도 성주의 영웅적인 지휘력에 감동하여 비단[絲繪] 100필을 보내 고구려 국왕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렸다. 성주의 이름은 야사(野史)에 양만춘(楊萬春 또는 梁萬春)이라고 전하나 정사(正史)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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