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민족회의

아프리카민족회의

[ African National Congress , ─民族會議 ]

요약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조직.
구분 정치조직
설립일 1912년
설립목적 민족운동 전개, 아프리카인 권리 옹호
주요활동/업무 저항운동, 범아프리카회의 및 게릴라조직 ‘민족의 창’ 결성, 석탄액화공사 폭파, 인종차별 철폐 주장 등
소재지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1910년 남아프리카연방이 결성된 직후, 흑인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 정부가 원주민지정지 제도를 도입하여 만든 ‘원주민토지법’에 반대하여, 1912년 요하네스버그의 아프리카인을 중심으로 ‘남아프리카 원주민민족회의’가 결성되고, 1923년 ANC로 개명하였다.

목표는 반인종주의 입장에서 아프리카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 있었으나, 수단은 청원·대표파견·선전 등의 합법적인 것이었고, 간디의 비폭력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ANC의 청년층이 온건한 수단에 반대하여 분열, 청년동맹을 결성하였고, 넬슨 R.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등 흑인인권운동가들이 이에 가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신분증명서 소지를 의무화한 법률에 강력히 반대하였으며, 이어 1948년 국민당정부가 들어서면서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과 백인우월주의를 강화하자, ANC도 이에 맞서 무력투쟁노선을 채택하였다. 1952년에는 알베르트 루툴리(Albert Luthuli: 1960년 노벨평화상 수상)가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같은해 불복종운동, 1954년 ‘자유헌장’ 채택 등 폭넓게 저항하여 많은 지도자가 체포되었으나 회원은 오히려 늘어나 10만 명을 웃돌았다.

1959년 ANC 내의 과격파가 분리되어 범아프리카회의(Pan Africanist Congress:PAC)를 결성하였고, 1960년 3월 PAC의 시위에 백인경찰관이 무차별 발포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낸 샤프빌사건이 일어나자 1961년 ‘민족의 창(Unmkhonto we Sizwe)’이라는 게릴라 조직이 탄생하고, 1962년 의장이던 만델라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민족의 창은 1969년 무장투쟁을 선언하고 1976년에 일어난 소웨토 봉기에서 경찰과 군대가 흑인 600여 명을 살해하자 흑인 대중들의 지지를 더욱 받았다. 1980년 석탄액화공사를 폭파하였으며, 1983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군본부를 습격, 2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계속해서 게릴라에 의한 파괴활동을 지속해왔다.

198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ANC의 해외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고 1982∼1984년 스와질란드와 모잠비크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주변국의 무력투쟁기지를 상실, 한때 고전하였으나 1984년 흑인대중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 폭동이 고조되자 민족의 창의 입지는 회복되고 더욱 강화되었다.

1990년 30여 년간의 비합법 조치에서 ANC ·PAC는 해체되고 만델라는 석방되어 부의장에 취임하였으며, ‘흑인참정권’을 위한 신헌법제정을 모색하기 시작한 드 클레르크 대통령의 국민당정부와 예비교섭을 벌임으로써 내외에 반아파르트헤이트의 실세로서 강한 인상을 주었다.

1994년 5월 민주적인 선거에서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99년에 임기가 만료된 그는 이미 오래 전 대통령직에 재도전할 의사가 없음을 공식 천명하였고, 후계자에 부통령 타보 음베키(Thabo Mbeki)를 지명하였다.

1999년 6월 ANC의 의장 음베키는 총선(하원)에서 단독으로 개헌할 수 있는 압승을 거두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46년간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통치해왔으며 ANC가 집권한 후에도 제1야당의 지위를 유지해온 국민당의 후신 신국민당(NNP)은 7.3%를 득표하는 데 그쳐 군소야당으로 전락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의회는 6월 14일 만델라의 후계자인 음베키를 만장일치로 임기 5년의 새 대통령에 선출하였다.

한편 1998년 ANC 고위 당직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은 북아일랜드 신페인당의 초청으로 아파르트헤이트에서 민주주의로 평화적인 이양을 실현하고 정치적 업적을 일궈낸 자신들의 경험을 알려주기 위해 북아일랜드를 방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