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누

아이누

[ Ainu , アイヌ ]

요약 일본의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 열도 등지에 분포하는 소수 민족.
아칸 아이누 마을 입구

아칸 아이누 마을 입구

원어명 あいぬ

아이누는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와 러시아의 사할린(Sakhalin), 쿠릴(Kuril) 열도 등지에 분포하는 소수 민족이다. 아이누란 아이누어로 ‘인간’을 나타내는 말로 이것이 민족의 명칭으로 보편적으로 쓰인 것은 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 시대부터이다. 그 이전까지 혼슈[本州]의 일본인들은 홋카이도 지역에 사는 아이누를 이민족이라는 차별의 의미를 담아 ‘에조[蝦夷]’라고 불렀고, 그들이 사는 지역을 ‘에조가시마(エゾヶ島)’, ‘에조치[蝦夷地]’ 등으로 불러왔다. 17세기부터 아이누인들은 화인(和人:홋카이도 이남의 일본인)과의 관계에서 ‘아이누’라는 말로 자기 민족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19세기 후반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에조’를 대신해 공식 민족의 명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메이지 정부는 1869년 ‘에조의 땅’이라는 뜻으로 쓰이던 ‘에조치[蝦夷地]’도 ‘홋카이도[北海道]’로 명칭을 바꾸었다. 오늘날 아이누인들은 스스로를 아이누어로 ‘친척, 동족’을 뜻하는 ‘우타리(ウタリ)’라는 말로 나타내기도 한다.

아이누는 그 외모나 풍습이 다른 일본인들과 뚜렷하게 구별되어 그 기원과 원(原) 일본인과의 관계 등이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전통적인 아이누인들은 눈이 깊고 코가 오뚝하여 얼굴의 윤곽이 오목조목 또렷하다. 좌우 눈의 간격과 눈썹과 눈의 사이도 좁으며, 눈썹의 길이도 매우 길고 대부분 쌍꺼풀이다. 그리고 몸과 얼굴에 털이 많다. 이렇듯 아이누는 얼굴이 편평한 몽골로이드(Mongoloid)의 일반적인 외모와는 다르기 때문에 한때 코카소이드(Caucasoid)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아이누 백인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아이누가 다른 일본인과 인종적으로 구분된다는 이러한 사고는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정부의 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쳐 민족 말살적인 동화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누는 얼굴이 오목조목하지만 코카소이드와는 달리 광대뼈가 나와 있으며, 털도 뻣뻣한 직모가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DNA 분석 등으로 아이누와 원(原) 일본인과의 관계가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그 결과 오늘날에는 아이누를 ‘북방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랭지 적응을 하지 않은 고(古) 몽골로이드’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방계 몽골로이드의 일부가 북으로 이동을 시작하여 오랫동안 오키나와와 일본 열도에 정착하여 조몬[繩文] 문화의 주역이 되었다가 북방계 몽골로이드(야요이 인)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는데, 야요이(彌生) 인들과 동화된 것이 후대의 일본인이고, 동화되지 않은 채 동북 방면으로 옮겨가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것이 아이누의 기원이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아이누가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고(古) 몽골로이드를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의 신체적 특징도 고(古) 몽골로이드의 특징을 현재까지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아이누의 기원과 원(原) 일본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으며, 각 학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 자료들도 충분하지 않다.

15~18세기만 해도 아이누인들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캄차카(Kamchatka) 반도의 남부, 북쪽으로는 사할린의 남부, 남쪽으로는 일본 혼슈의 동북부 지역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할린의 북쪽이나 헤이룽강[黑龍江] 유역, 캄차카 반도까지 교역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누는 주거의 분포에 따라 홋카이도 아이누와 사할린[일본명 카라후토(樺太)] 아이누, 쿠릴[일본명 치시마(千島)] 아이누로 나뉜다.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아이누는 북방 민족이나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홋카이도의 아이누와는 문화적 차이를 나타내며, 강제 이주 등으로 오늘날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홋카이도의 아이누도 급격한 인구 감소와 민족 정체성의 상실 위기를 겪고 있다. 홋카이도에 거주하는 아이누의 숫자는 1993년에는 23,830명이었지만, 2000년 3월에는 23,767명으로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근대 이후 일본 정부와 사회는 아이누의 문화와 전통을 미개시하고 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켜야 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아이누의 전통적 생활 관습을 강제로 금지시켰으며, 홋카이도 개척의 과정에서 아이누를 강제로 이주시키며 그들의 토지를 약탈했다. 이에 따라 오랜 기간 독특한 문화를 가꾸어왔던 아이누의 전통 문화는 파괴되었으며, 아이누인들은 억압과 차별을 받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