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문명

아즈텍문명

[ Aztecan civilization ]

요약 14세기부터 에스파냐 침입 직전까지 멕시코 중앙고원에 발달한 인디오의 문명.
아스텍 문명 유적지

아스텍 문명 유적지

멕시코에는 예로부터 몇 개의 고도로 발달한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그 중 가장 영향이 강했던 테오티우아칸 문화는 7세기경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톨텍문화가 12세기에 수도 투라에서 멕시코 중앙고원의 텍스코코 호반으로 옮겼을 때, 영향을 받아 많은 도시국가가 성립되었다. 그 중에 가장 강력했던 것은 텍스코코와 타쿠바였다. 14세기에 북멕시코에서 이동해온 수렵민족인 아즈텍족이 텍스코코호(湖)의 작은 섬에서 신의 계시를 받아 테노치티틀란이라는 도시를 구축하였다(1325년). 그리고 아즈텍이라는 이름 대신 멕시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때 받은 신의 계시는 독사를 물고 날아간 독수리가 선인장위에 앉으면 그곳에 도시를 세우고 정착하라는 것이었다. 독수리가 내려 앉은 곳에 세워진 테노치티틀란은 텍스코코와 타쿠바와 더불어 강대해졌고 3자간에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3자는 서로 협력하여 멕시코 중앙고원을 중심으로 한 여러 도시를 정복하고 그들로부터 조공(朝貢)을 받아 부(富)를 삼분(三分)하였고 아즈텍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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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코코, 타쿠바와 삼각동맹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멕시카(아즈텍)의 목테수마 1세가 제국을 통치하면서 점차 주변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15세기 말부터 아스텍은 갑자기 군사와 정치력을 증강하여 수도로 삼을, 섬 북쪽의 상업도시 토라테로르코를 1473년에 합병하고 이어서 1500년까지 텍스코코와 트라코판을 완전히 제압하였으며 거대한 아즈텍 제국의 주권자가 되었다. 1502년 목테수마 2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삼국동맹에서 절대군주제로 바뀌었고 주변의 광범위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아즈텍 제국은 주변의 복속국에서 바치는 풍부한 공물과 노동력으로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공물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점차 먼곳까지 원정을 가게되었다. 이는 제국을 번성하게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였지만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아즈텍족은 수렵민이었으므로 문화수준이 낮았다. 그들은 주변의 여러 문화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특히 그들이 국가형성을 이룬 뒤에 만들어낸 종교체계나 천문·역법(曆法)·문학 등은 주로 텍스코코를 통해 받아들인 톨텍계(系) 문화에 바탕을 두었다. 그들의 우주관(宇宙觀)은 툴라족의 톨텍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세계를 네 부분의 수평(水平)으로 구분하며 수직면(垂直面)으로서는 9층씩의 천상세계와 지하세계를 설정하였다. 하늘은 대지를 둘러싼 물과 함께 일종의 통(筒) 모양의 천장을 형성하고 거기에는 커다란 대들보에 의해 서로 격리된 궤도(軌道)가 층을 이루고 달·별·혜성(彗星) 등이 지나다닌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 위에는 신들의 영역이 있고 다시 그 위에는 이원성(二元性)의 장소인 오메요칸이 위치하여 거기에 이원신(二元神)인 오메테오톨이 최고신으로 존재하였다.

이와 같은 우주관은 아즈텍의 사회생활을 전면적으로 규제하고 있었다. 즉 오메테오톨은 많은 신들을 자식으로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은 대지·공기·물·불 등 4요소에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저마다 태양이 되어 우주의 네 구역에서 행동을 일으켜 세계에 변화와 갈등과 진화를 가져다 주면서, 탄생과 사멸의 주기(週期)를 되풀이하며 역사의 각 시대를 구성한다고 생각하였다. 아즈텍인들은 세상은 4번의 창조 활동이 있었고 각 세상마다 그 세상을 지키는 태양이 있었으며 그 태양들은 모두 명망하였고 자신들은 5번째 태양신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다. 아스텍은 자기들이 지진(地震)을 나타내는 제5의 태양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태양이 사멸하고 우주(宇宙)가 멸망하는 것을 막고 신이 창조한 우주가 지속적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적인 인신공양(人身供養)를 행했던 것이다. 즉 세계의 본질인 허무의 암흑과 싸우는 태양에게 인간의 피와 심장을 바쳐, 여기에 활력을 주어 영원히 아스텍 시대를 지속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스텍은 인신공양를 행하기 위한 여러 개의 대신전을 수도에 세웠고, 엄격하게 지키고 있는 달력에 의해 제일(祭日)을 정하여 각종 의식을 행하였다. 또한 산 제물을 잡아다가 끊어지지 않고 바치기 위하여 강대한 군사조직을 만들었다. 전쟁으로 정복한 지역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살아있는 사람의 가슴을 절개하여 심장을 꺼내고 살아있는 심장을 신을 위한 제물로 바쳤다. 1년에 약 2만명의 포로를 잡아다가 재물로 바쳤으며, 이런 포로를 잡기위한 전쟁을 꽃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아즈텍은 이렇게 공포정치를 행하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지배수단이기도 했다. 많은 종속도시로부터 완비된 세제(稅制)에 의해 받아들인 방대한 양의 공물은 모두 이와 같은 종교·사회기구를 확장하고 기능을 확대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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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조직면에서 아즈텍은 카르프리라는 공동체 조직을 단위로 하는 계급사회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공동체적인 토지 보유의 형태가 보이는 한편, 그 도시생활에 있어서는 사회 계층과 직능에 따라 거주구역의 행정조직이 이루어져 있었고 자치적인 경찰과 사법(司法) 조직도 발달해 있었다. 직업도 여러 갈래로 분화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포추테카라고 불리는 상인(商人) 계층이었다. 그들은 토라테로르코·초르라 그 밖의 도시에서 큰 시장을 개설하였고, 그들 집단은 멕시코·중앙아메리카 지방을 널리 여행하며 교역을 행하였다. 또한 귀족·평민의 교육기관도 발달해 있었다.

이처럼 발달한 아즈텍문명은 1520년 갑자기 나타난 에스파냐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거느린 수백 명의 군대의 침입으로 수개월에 걸친 외교교섭과 격렬한 전투 끝에 멸망하였다. 그러나 그 문화의 모습은 정복된 후 건너온 가톨릭교 성직자들 중의 유지와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아즈텍 시대에 텍스코코 등에서 만들어진 인디오의 그림 몇 가지가 소멸을 면하였으며, 또한 에스파냐 식민지시대에 복제(複製)된 그림도 상당히 있으므로 아즈텍 문화의 상세한 점이나 그 왕조의 역사는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