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섬

시칠리아섬

[ Sicilia I. ]

요약 이탈리아 남서부에 있는 지중해 최대의 섬으로 영어로는 시실리섬(Sicily I.)이라고 한다. 주변의 작은 섬과 함께 이탈리아의 한 주(州)를 형성하며, 주도(州都)는 팔레르모이다. 북동단은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본토 남단에 접한다.
라 칼라 요트 선착장

라 칼라 요트 선착장

위치 이탈리아 남서부, 북동단은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본토 남단에 접함
면적 2만 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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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자연
  2. 산업

시칠리아섬은 예로부터 청동기문화를 가졌던 시쿠리인·시카니인이 살고 있었으나, BC 8세기 무렵 동부에는 그리스인이, 서부에는 페니키아인이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다. 특히 시라쿠사는 BC 5세기에 지중해 최대의 그리스 식민도시를 이루었다.

BC 3세기 중엽에는 로마에 정복되어 곡창 구실을 하였다. 5세기에는 반달·동(東)고트의 침입을 받았으며, 6세기에는 비잔틴령(領)이 되었다. 9세기에 이슬람의 침입이 시작되어 11세기까지 그 지배하에 있었으나, 그 후 노르만인이 정복하여 1130년 시칠리아와 나폴리에 걸친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1194년 독일의 슈타우펜가(家)가 왕위를 계승하고, 특히 프리드리히 2세의 치하에서 비잔틴·이슬람·노르만의 전통을 받은 독특한 문화가 발전하였다. 1266년 프랑스의 앙주가(家)가 왕위를 획득했으나, 1282년 반(反)프랑스 폭동(시칠리아의 만종)에 의해 섬에서 추방되고 에스파냐의 아라곤가(家)가 지배자였다. 15세기에 에스파냐의 지배는 나폴리까지 미쳤으며, 16세기부터 1713년까지 시칠리아왕이 나폴리왕을 겸하였다. 그 후 사보이가·합스부르크가가 지배하였다.

1738년 에스파냐의 부르봉가(家)가 이에 대신하고, 1816년 시칠리아·나폴리를 통합해서 양(兩)시칠리아왕국을 건국하였다. 1860년 가리발디의 원정에 의해서 이탈리아왕국에 병합되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외국지배를 받은 결과, 산업은 정체되어 오늘날까지도 북부 이탈리아와는 큰 격차를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의 공화제 이행(移行)에 따라 자치주가 되었다.

시칠리아섬 본문 이미지 1

자연

지형은 아펜니노산맥의 연장인 펠로리타니·네브로디·마도니에의 3개 산지가 북쪽에 줄지어 있고 동쪽에는 이탈리아 최고봉인 에트나산(3,323m)이 솟아 있다. 에트나산에는 늦은 봄까지 눈이 남아 있어 이것을 이용해 세계에서 최초로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산지와 구릉지대의 대부분은 에트나산을 제외하고는 석회암질의 암석으로 구성되어 식물생장을 보기 어렵다.

비옥한 충적평야는 시메토강 유역의 칸탈리나평야와 '황금의 골짜기'라고 부르는 팔레르모 주변에 한정된다.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해서 해안연변의 지대와 관개 경지 외에는 거의 농작물의 재배가 불가능하다. 천연자원으로는 섬의 중앙부에서 산출되는 유황, 남쪽의 라구사를 중심으로 하는 유전이 중요하며, 주변의 해역은 천해어(淺海魚)·다랑어 등의 어업자원이 풍부하다.  

산업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정부는 남부개발정책의 일환으로 시칠리아의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정책적으로 추진하여 농지개혁에 따른 대토지소유의 농민에 대한 배분과 토지개량·공장유치·석유산업의 개발, 도로 정비 등을 시행하였다. 그 성과로서 젤라에는 석유화학단지가 건설되고, 팔레르모와 카타니아에는 공장지대가 형성되었으나, 농업에서는 감귤류·포도의 재배 외에는 생산성이 매우 낮다.

이탈리아 본토와는 메시나 해협의 페리보트, 팔레르모∼나폴리의 항로, 팔레르모 및 카타니아∼밀라노·로마의 공로에 의해서 연결되며, 섬 안에도 철도망·도로망이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다. 세제스타·세리순테 등의 그리스 유적, 팔레르모 등의 여러 도시, 에트나산(3,323m)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과 독일·이탈리아군의 전쟁터가 되어 많은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었다. 또, 메시나를 비롯하여 시칠리아 각지는 역사상 몇 번의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