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비판

스탈린비판

요약 스탈린의 이름과 결부된 소련에서의 공산주의 운동 ·정책 및 체제에 대한 당 내외로부터의 비판을 가리키는 말.

1930년대에는 망명 중의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1937) 등으로 스탈린의 지도와 그 정책을 비판하였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사후 베리야가 추방되자 당내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1956년 2월의 제20차 공산당대희에서는 미코얀이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였다. 특히 제1서기 흐루쇼프는 비밀보고로 알려져 있는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라는 보고를 하였다.

그것은 ① 스탈린에 의한 당규범(黨規範)의 파괴와 충실한 간부의 숙청, ② 특히 1941년 6월 독-소전쟁 개시기의 외교 ·전쟁지도에 대한 과오, ③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테러 등의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스탈린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의 내용은 상당히 한정된 것으로서 1920∼1953년에 스탈린이 시행한 정책에 대한 부분적인 비판에 불과하다. 부하린이나 트로츠키의 복권, 1930년대의 농민에 대한 억압, 당시의 당 간부인 몰로토프나 흐루쇼프의 책임 등은 논급되지 않았다.

이 보고는 미국 국무성에 의하여 공표되었고, 또 같은 1956년 6월에 당중앙위원회 결정이 스탈린의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결정 ·보고는 세계의 여론과 각국 공산당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폴란드에서는 개혁파인 고물카가 정권을 잡았고, 헝가리에서는 10월에 반소봉기(反蘇蜂起)가 일어나 소련군이 개입하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건도 있어서 스탈린 비판은 1957년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가 지도부로부터 추방된 후에도 진전이 없었으나 1961년의 제22차 당대회에서 다시 스탈린비판이 논의되어 그의 유해는 레닌묘(廟)에서 제거되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와 같은 라게르(강제수용소)문학이 비로소 공표된 것도 이 때였다.

1964년 10월에 흐루쇼프가 실각했을 때 당내의 신(新)스탈린파가 스탈린 복권에 착수했으나 당의 내외, 특히 지식인들의 스탈린 비판운동이 고조되고, 1969년의 스탈린 탄생 90주년에는 동(東)유럽으로부터의 압력도 있어서 당국은 그의 복권을 단행하지 못하였다. 그 후 스탈린 비판은 당의 엘리트측(側)으로부터의 한정적(限定的) 비판이 아니라, 소련 민중으로부터 광범히 비판되었다는 것은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收容所群島)》(1973)나 메드베데프의 《역사의 심판을 구하여》(1972)에서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