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명필

삼대명필

[ 三大名筆 ]

요약 조선시대 글씨가 특출하였던 세 사람의 서가(書家), 석봉(石峰) 한호(韓濩),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일컫는다. 한호는 해(楷)·행(行)·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양사언은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 때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김정희는 시서 ·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를 고도로 구현한 청(淸)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석봉(石峰) 한호(韓濩),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일컫는다.

한호는 개성 출생으로, 왕희지(王羲之)·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행(行)·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선조 37) 흡곡현령(洹谷縣令)·존숭도감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을 지냈다. 그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회석에 나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었다. 작품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나 비문(碑文)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용인) 《서경덕신도비(徐敬德神道碑)》(개성) 《기자묘비(箕子廟碑)》(평양)《김광계비(金光啓碑)》(양주) 《행주승전비(幸州勝戰碑)》《선죽교비(善竹橋碑)》 《좌상유홍묘표(左相兪弘墓表)》 등이 있다.

양사언은 1546년(명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평창군수(平昌郡守)·강릉부사(江陵府使)·함흥부사 ·철원군수·회양(淮陽)군수를 지내는 등 지방관을 자청하였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 때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김정희는 1819년(순조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시서 ·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 미를 고도로 구현한 청(淸)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등이 있다.

참조항목

김정희, 양사언, 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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