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기대

별기대

[ 別騎隊 ]

요약 훈련도감 내에 마병(馬兵)의 일부로 편성된 부대.

원래 훈련도감 내에서 마병은 6초(711명)의 규모로 출발하였고, 이 인원은 1682년(숙종 8) 군제변통이 있은 후에도 6초(714명)로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규모와 구성이 변화된 것은 1724년(영조 4년)의 무신란(戊申亂)이 지난 후였다. 영조는 무신란을 진압한 후, 훈련도감 군병으로 전공(戰功)을 세운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춘당대(春塘臺)에 친히 나가 무사들을 시험하였다. 이때 전공을 인정받은 군사들은 초시(初試)를 보지 않는 혜택이 주어졌다.

이 시험의 결과 훈련도감의 마병과 보군(步軍) 가운데 합격한 자가 150여 명에 이르렀으나, 합격자는 도리어 봉급을 받지 못해 생계가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훈련대장 이삼(李森)의 청에 따라 합격자 150명 중 마병으로서 합격한 98명은 따로 명칭을 정하되 훈련도감 마병으로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이들 합격자 98명이 토대가 되어 별기대 1초(哨)가 만들어지고, 이들은 훈련도감 마병 좌전초(左前哨)로 편성되었다.

마병은 여전히 6초 규모였지만 그 중에 군공을 인정받고 시험에도 합격한 자들이 별기대라는 명칭으로 여타의 마병과는 구별되어 편성된 셈이었다. 이들은 마병 내에서도 구별되는 존재였으므로 그 지휘관 즉 별기대 초관(哨官)도 목사(牧使)나 부사(府使) 경력이 있는 자를 임용하도록 《속대전(續大典)》에 명문화되기에 이르렀다. 훈련도감 내 마병 6초의 규모는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이 편찬되는 1749년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순조 때에 이르러 별대(別隊) 1초가 추가되어 7초로 그 규모가 확대되었고, 마병 7초의 규모는 고종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별기대는 순라를 돌거나 입직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정조 때부터는 큰 조회(朝會)가 있을 때 문을 지키는 일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참조항목

별기위, 훈련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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