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인간의 행동양식, 예술 ·기예 및 사물의 존재양식에서 한국인의 독특한 감각으로 여과(濾過) ·표출되는 미적 관념(美的觀念), 또는 그 미적 형태.

멋을 나타낼 수 있는 외국어는 없다. 또, 멋은 한국말로도 몇 마디로는 풀이하기 어렵다. 그 말에는 일반적 의미가 아닌 특수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풍류(風流)나 서양의 유머는 한국의 멋에 가까운 것일 수가 있다. 그러나 풍류 ·유머는 멋의 한 속성(屬性)으로서 멋의 한 단면이 될지언정 멋이라는 개념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은 물론, 부분적으로도 완전히 부합된다고 할 수 없다. 멋은 그만큼 한국적 독자성을 가지는 말이다. 가령 영어에서의 ‘humour’ ‘fun’ ‘satire’ ‘wit’ ‘pun’ 등과 같은 말은 한국말의 농(弄) ·우스개 ·익살 ·재치 ·재담 등으로 번역한다 해도 크게 거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dandyism’ ‘foppery’ ‘taste’도 맵시 ·취미 ·맛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멋은 위에 든 어떤 단어로도 번역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멋의 한 속성으로서 부분적으로 유사개념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멋을 뜻하는 전체로서의 일반개념으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멋은 아(雅)도 아니고 속(俗)도 아니다. 고아(高雅)하다고 하기에는 통속적인 면이 있고, 그렇다고 범속하다고 하기에는 법열(法悅)이 있다. 그렇게 ‘아’와 ‘속’을 넘나들며 그 어느 쪽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또 그렇다고 고정되지 않는 것도 아니니, 멋의 정체는 한국 사람으로서도 바르게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을 지닌다. 멋은 맛에서 출발된 말이라고 한다. 두 말에는 음상(音相)의 대립이 있을 뿐 동의어라는 견해에 대해, 맛이 감각적 뜻을 지니고 멋은 감성적 뜻을 지닌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멋이 맛에서 출발된 말임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멋이란 말은 맛이라는 말뜻을 좀 다른 어감(語感)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발음적인 왜형(歪形)으로 시작되었다가 차츰 다른 관념형태로 바뀌면서 본뜻과는 달라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멋은 맛을 바탕으로 하여 그것을 다시 뛰어넘은 것이므로, 멋에는 일반적인 맛이 있을 뿐 아니라 특수한 맛(멋)까지 있다. 그러나 맛은 다만 맛 그대로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멋은 어느 것이나 맛을 동반하지만, 맛은 어느 것이나 다 멋이 되지는 않는다. 흔히 아름다움을 멋과 혼동한다. 멋은 분명히 한 모습이지만 모든 아름다움이 멋은 아니다. 또, 멋은 생활풍속에 대한 애정이나 익숙해진 감정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그 존재 양태의 여하에 따라 멋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을 뿐, 그 자체를 멋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멋의 미적인 내용은, 형태미 ·표현미 ·정신미의 3각도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① 형태미:멋이 나타낸 상태에 대한 관점이다.
그 첫째가 비정제성(非整齊性)이다. 이는 미술 ·음악 ·문학 등에서의 멋의 형태는 그 존재양태가 산술적이고 일률 ·정규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비정제성은 음악이나 시가(詩歌)의 형식에서 나타난다. 한국음악은 아악 ·민속악 할 것 없이 무반음(無半音) ·5음계가 기초로 되어 있거니와, 이 무반음 ·5음계 진행을 깨는 것이 반음계 사용이다. 그것이 불건전하고 감상적이며 육감적이라 하여 기피되기도 했지만, 멋있는 율격(律格)으로 되는 것이 사실이다. 정조(正調)를 일탈한 가야금산조에도 멋은 흐른다. 이러한 비정제성은 시가에서 정형(定型)의 틀을 부순다. 시조문학에서의 탈정형(脫定型)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멋은 정상 ·정규를 일단 벗어나는 데서 비롯된다 해도 그 비정제성에 중심이 없고 통일이 없을 때 파괴된다. 그러므로 멋의 비정제성은 막연한 산만성이 아니라 중심과 통일을 가진다. 그 둘째가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단조로움에서 벗어나는 변화에의 의욕이다. 이 멋의 다양성은 ‘흥청거림’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그 흥청거림 때문에 통일을 깨뜨리고 균제(均齊)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셋째가 율동성(律動性)이다. 멋이란 본디 생동태(生動態)의 미로서, 만들어진 다음에 보는 것이라기보다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보는 미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움직이는 가운데 잠깐 그치는, 즉 단절(斷絶)의 멋도 포함된다. 빠르던 가락이 문득 그치면서 잠깐 쉴 때, 그 침묵의 순간 또한 멋을 주기 때문이다.
넷째로 들 수 있는 것이 곡선성(曲線性)이다. 곡선미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한국의 춤이다. 회화목공예에서도 반달형의 곡선이 나타나고, 소리꾼들의 ‘엮고’ ‘휘이고’ ‘흥청거림’ 또한 곡선성의 표현이다.

② 표현미:표현미로서의 멋은 멋이 나타나게 하는 구성력이나 표현방법의 문제이다. 멋의 표현적 특질로서 기초가 되는 것은 초규격성(超規格性)이다. 격(格)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비규격성이다.
그 같은 멋 표현의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원숙성(圓熟性)이다. 멋을 체득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숙한 기법이 있어야 한다. 이미 있는 기법을 터득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멋을 지닐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가 좋은 본보기이다. 멋 표현의 둘째는 왜형성(歪形的), 즉 데포르마시옹이다. 정규형식에서 벗어나 약간의 왜곡이 형성될 때 생기는 멋이다. 멋 표현의 셋째는 완롱성(玩弄性)이다. 그것은 원숙에서 오는 잉여성(剩餘性)과 왜형에서 오는 해학성이 그 바탕이 된다. 다시 말하면, 여유와 유희의 기분에서 우러나는 표현원리이다. 구성진 소리들이 그렇고, 어깨와 손끝의 미묘한 율동을 보이는 춤이 그러하다. 문학에 나타나는 익살이나 재담 ·해학들 또한 그것이다.

③ 정신미:정신미의 첫째 특질은 무실용성(無實用性)이다. 순수한 미적 충동이란 본디 실용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실용성이나 공리성(功利性)과는 관계없는 미적 충동이 생활과 결부되면서 생활예술이 발생했다는 것뿐이다. 그릇에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해서 그릇으로서의 효용을 잃는 것도 아니며, 칼자루에 조각을 하지 않았다 하여 칼의 효용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르익은 기술행위와 정신적 열락(悅樂)을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효용으로서의 실용성도 있다. 그것은 일종의 초탈미(超脫美)이다.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이 화동성(和同性)이다. 멋에는 대립과 갈등이 없다. 조화와 질서와 흥취의 세계이다. 이 화동성은 고고성(孤高性)과 통속성의 양면을 동시에 지닌다. 속중(俗衆)과 더불어 즐길 수도 있되 그 오욕됨에는 물들지 않고 높고 깊은 경지에 노닐면서도 고절(孤絶)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멋 정신의 셋째는 중절성(中節性)이다. 멋은 비실용성이므로 사치성이 있다고 하겠으나, 직접적인 사치의 상태는 아니다. 사치만으로 될 때 멋은 깨어진다. 높은 교양과 고매한 사상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수련과 절제가 따라야 한다. 멋의 감정은 방종과 탐닉이 아니고 지적인 절제에 의하여 영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균형과 조화를 잡는 중절(中節)에 정신적인 멋이 있다.

멋 정신의 넷째는 낙천성이다. 멋의 참다운 마음자리는 낙천성이다. 이 낙천성은 조화와 절도(節度), 성실과 유락(愉樂)을 바탕으로 하여 유유자적하는 경지를 말한다. 멋의 유락은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서 찾는 것이며, 변화의 상태가 아닌 한적한 상태에서 찾는 낙도(樂道)의 경지이다. 그것은 선비정신이 찾던 마음자리이기도 하다.

참조항목

미학, 풍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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