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코드음악

레코드음악

[ recorded music ]

요약 녹음된 음악.

레코드(record)가 기록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레코드음악은 녹음된 음악으로 녹음재료와 방법에 따라 호칭이 달라진다. 그러나 둥근 원반에 홈[音溝]을 파 녹음하는 방법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반(音盤) 또는 디스크(disc) 등이 레코드음악의 명칭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금속제 코드나 테이프에 녹음된 음악도 일반적으로 레코드음악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음반 가운데는 음악 이외의 녹음도 있어 레코드란 명칭으로 불린다.

레코드음악은 실제 연주를 녹음하여 1회성을 가진 연주를 반복 청취할 수 있도록 정착시킨 것이다. 연주의 1회성을 중요시하는 경우 신선미가 없는 복제로 생각될 수 있으나, 악곡을 자유롭게 감상하려는 청취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음악감상의 편리하고 뛰어난 도구가 되고 있다. 오늘날 레코드음악은 음악을 재생시키는 문헌(文獻)으로서 음악교육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나아가서는 음악보급과 연구에 있어 세계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레코드음악의 발전
T.에디슨이 1876년 축음기를 발명한 이후 현재까지의 레코드 발전은 다음의 다섯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876∼1900년은 레코드의 발명과 초기 실험시대(음향 녹음까지), 1900∼25년은 고전음악 녹음부터 전기(電氣)음악으로 될 때까지, 1925∼48년은 전기음악시대부터 LP음반 출현까지, 1949∼56년은 LP음반 발달부터 스테레오 탄생까지, 1957∼현재는 스테레오 발전기이다.

제1기는 원통에 얇은 주석박(朱錫箔)을 입혀서 바늘을 이용하여 녹음을 시작한 때부터 주석박 대신 밀초의 원통을 사용한 시대로, 1887년에 독일의 E.베를리너가 원반녹음 방법을 발명하여 그래머폰이란 명칭을 붙였다. 이 시기에는 음을 막(膜)에 받아 새기는 어쿠스틱(acoustic) 녹음시대였다. 최초로 음악을 취입한 사람은 아마추어 가수 L.몰튼이었다. 이어 89년경에 스웨덴의 소프라노 가수 S.아르놀드손이 전문가로서는 최초의 녹음을 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브람스가 빈에서 취입하고, 1880년부터 90년에 걸쳐서는 유럽의 성악가들과 런던 수정궁(水晶宮)의 연주회 등이 취입되었다. 96년경부터 평면원반이 보급되어 초기 레코드음악사에서 성악시대를 불러왔다. 당시 레코드회사들은 일류 가수들을 경쟁적으로 채용하여 오페라의 아리아와 예술적 가곡 등을 녹음하여 많은 가정에서 고전과 표준가곡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제2기에는 런던에 설립된 그래머폰 앤드 타이프라이터회사에 의해 영국 가수들이 녹음하고, 프랑스에서는 1901년에 모리스 르노가 일련의 레코드를 제작했으며, 1902년에는 신진 테너 가수로 촉망받은 E.카루소가 녹음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는 등 각국의 가수들이 전 유럽에서 명성을 떨쳤다. 1903년에 컬럼비아사(社)가 《명연주가집:Celebrity disks》이란 제목으로 E.레슈케, M.셈브리히, E.슈만하인크, A.스코티 등을 수록하고, 빅터사(社)에서는 L.호머, R.블라스, 주세페, 캄파넬리를 수록, 이때부터 레코드가 교육용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1904년 영국의 교육가인 허먼 클라인이 소프라노 연습용 레코드를 제작했으며, 1905년부터 2년간 베를린에서 릴리 레만이 자신의 레슨용 독창곡을 오데온사(社)에서 취입한 34장의 레코드는 음악사상 최장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가곡의 반주에 소(小)관현악단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05년부터이며 그 때까지는 피아노가 사용되었다. 니키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니관혁악단이 베토벤 교향곡 제5번을 녹음한 것이 1909년이며, 기악은 1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녹음되기 시작하였다.

제3기는 마이크로폰에 의한 전기취입시대이다. 24년에 최초로 시험된 뒤 관현악기 전부를 충실하게 녹음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실내악을 비롯하여 교향악 ·오페라 전곡(全曲)이 앨범으로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는 각 레코드회사들이 각종 녹음방법을 고안하여, 음역(音域)은 30사이클에서 5,500사이클까지 확대되고 회전수는 1분에 78회전과 80회전을 표준으로 하여 10인치(25 cm)와 12인치(30 cm)의 레코드 사이즈가 정형화하였다. 이로써 작품과 연주가의 특질을 집에 앉아서 손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레코드는 음악감상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유럽의 음악사를 담은 레코드를 비롯하여 각 부문 음악의 전곡을 최고 연주진의 연주로 녹음한 레코드가 쏟아져 나왔다. 이 무렵부터 레코드 전문잡지나 레코드음악 감상법에 관한 서적이 전 세계적으로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제4기는 LP레코드시대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허탈감을 메우려고 나온 것이 LP레코드이다. 레코드의 회전수를 줄여 1분에 33회전 3분의 1의 속도로 연주시간을 연장시키는 시도는 32년 빅터레코드사(社)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스토코프스키 지휘로 필라델피아교향악단이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제5번을 12인치(30 cm) 양면에 녹음하는 데 성공했으나 잡음이 많아 음질은 좋지 않았다. 48년 플라스틱공업이 발달하여 미립자물질인 비닐을 레코드 원료로 이용하는 데 성공, 침음(針音)을 줄이고 33회전 3분의 1의 속도로 장시간 연주에 견디는 LP레코드가 탄생하게 되었다. 고안자는 P.골드마크이고, 최초로 판매한 것은 48년 6월 미국 컬럼비아사(社)이다. 최초의 LP레코드는 N.미르시틴 독주로 부르노 월셔가 지휘한 뉴욕 필하모니관현악단이 연주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이다. LP판은 연주시간을 계속 확대하여 독일에서 78회전에 홈[音溝]의 간격을 변경하여 종래의 2배를 연주하는 VG판(variable grade) 또는 VM판(variable micrograde)과 이를 7인치(17 cm)판에 응용한 EP판(extended playing)까지 탄생하였다. EP판의 보급에 따라 종래의 78회전 녹음판은 SP판(standard playing)으로 부르게 되었다. 테이프 녹음기술이 발달하여 30사이클부터 2만 사이클까지 인간의 가청(可聽) 진동수를 녹음하여 재생하는 기계가 급속도로 개발되어 하이 파이(Hi-Fi:high fidelity:高忠實度)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LP와 Hi-Fi의 발달은 레코드와 실제 연주의 간격을 더욱 좁혔다. 또 어떤 장소에나 휴대와 연주가 간편한 테이프레코드도 붐을 이루었다. LP는 세계 각지와 동서고금의 연주 및 민속음악을 간편하게 듣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제5기는 현대의 스테레오시대이다. 입체녹음의 뜻을 지닌 스테레오레코드가 발표된 것은 57년으로, 런던레코드사(社)와 웨스트레크사(社)에서 각각 발매되었다. 전자는 종횡으로 새긴 홈에 의한 VL방식인 데 비해 후자는 45-45방식을 채택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45-45방식이 전세계 표준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82년 레이저광선을 이용한, 바늘 없이 소리를 재생할 수 있는 콤팩트디스크가 개발되어 LP레코드 생산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한국의 레코드음악
한말 유성기(留聲器)와 더불어 구미에서 들여온 레코드는 실로 당시의 사회를 경도(驚倒)시킨 문명의 이기(利器) 가운데 하나였다. 1899년(광무 3) 3월 13일자 《황성신문》에는 “西洋 格致家(연구가)에서 發明한 留聲器를 買求하야… 置하였는데 其中으로 歌笛笙瑟聲이 運機하는레코드음악 본문 이미지 1 出하야 完然히 演劇場과 如하니…”라는 기사가 실려 있어 유성기와 레코드는 이 때 들어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도쿄[東京]의 천상당(天賞堂)에서 판매한다는 이 신기한 ‘소리판’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고, 조정에서도 이를 구경하기 위해, 일본인 기술자가 녹음장치를 가지고 고종황제 앞에서 당시 광대로서 유명한 박춘재(朴春載)의 노래를 취입하였다. 노래가 끝난 후 토시[吐手]처럼 생긴 녹음기 속에서 노랫소리가 울려나오자 고종은 깜짝 놀라며, “춘재, 네 명(命)이 10년은 감했겠구나”라고 말했다 한다. 당시 사람들은 녹음기가 정기(精氣)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에서 외국 레코드가 처음으로 판매된 것은 1908년 2월 미국 빅터회사에서 취입한 《韓國 서울 聖桃彩玉唱夫西唱》(朴容九 소장)으로 이 레코드는 한쪽 면만 녹음된 것이다. 13년 《매일신보》에는 “새 소리판 왔소. 소리 넣은 사람 宋萬甲 朴春載 金蓮玉 趙牧丹…”이라는 레코드광고가 실려 있어 초창기의 취입은 조선창(朝鮮唱)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20년대에 들어 레코드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레코드음악은 본격적으로 대중화시대를 맞이하였는데, 26년 현해탄에서 정사(情死)한 윤심덕(尹心悳)의 유작(遺作)인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로 시작되는 《사(死)의 찬미》가 레코드음악의 확산에 기폭제적(起爆劑的)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27년에서 30년 초반까지는 ‘유행소곡(流行小曲)’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레코드가 출현하여 새로운 대중가요의 시대를 열었다. 28년 채규엽(蔡奎燁)이 취입한 《봄노래》, 29년 이애리수(李愛利秀)가 취입한 《황성옛터》가 모두 이 때의 유행가이며, 《황성옛터》의 작곡가 전수린(全壽麟)은 이 곡으로 한국적 유행가의 비조(鼻祖)가 된 셈이다. 29년 이철(李哲)은 오케레코드사를 설립함으로써 최초로 한국인에 의한 레코드사가 출현하였거니와 그는 첫 레코드로 기생출신 가수 박부용(朴芙蓉)이 취입한 《노들강변》을 내놓아, ‘신민요’라는 새로운 형태의 노래를 낳게 하였다.

그후 35년을 전후해서 레코드는 공전(空前)의 붐을 일으켜 창가 ·유행가 ·동요와 더불어 양악도 처음으로 출반(出盤)되었는데, 계정식(桂貞植)의 바이올린에 의한 《타이스의 명상곡》, 정훈모(鄭勳謨)의 소프라노 독창 《솔베이지의 노래》가 이 때 취입되었다. 이 무렵에는 수입된 양악(洋樂) 원반의 보급도 활발하여 음악잡지의 레코드목록에 “바요링협주곡 E단조(十二吋三枚 十圜半):멘델존 작, 倫敦필하모니, 바요링에 세계적 거장 크라이스러”라고 소개되어 있어, 당시레코드의 치수와 값을 알 수 있다. 35년 12월호 《월간음악》에는 당시 축음기(蓄音機)의 보급대수가 30만 대임을 알렸다. 8 ·15광복 후에는 고려 ·서울 ·도미도 레코드사(社) 등이 주로 대중가요를 녹음하였다. 그 뒤 성음제작소가 67년 영국의 데카사(社)와 계약을 맺어 한국 최초로 라이센스음반을 내놓았으며, 86년 무렵부터는 SKC가 콤팩트디스크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국내연주가의 음반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