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공

남이공

[ 南以恭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정유재란 때 북인(北人)의 수뇌로 당쟁에 가담하였다. 이조판서,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를 겸직하였다. 문집으로 《설사집》이 있다.
출생-사망 1565 ~ 1640
본관 의령
자안
설사
별칭 초명 이경
활동분야 정치, 행정
주요저서 《설사집》

본관 의령(宜寧). 자 자안(子安). 호 설사(雪簑). 초명 이경(以敬).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하여, 1593년 사서(司書)가 되고 평안도 암행어사를 거쳐 지평(持平)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어 이발(李潑) ·정인홍(鄭仁弘) 등과 북인(北人)의 수뇌로 당쟁에 가담하고,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 왜구와의 화의를 주장했다고 하여 탄핵, 파직시켰다.

1599년 북인이 분열되자 소북(小北)의 영수가 되었다가 유영경(柳永慶)과 함께 파면되었다. 광해군 초에 다시 기용되어 형조참의(刑曹參議) ·예조참의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615년(광해군 7) 당쟁으로 파직된 뒤 평산(平山) ·해주(海州) 등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619년 풀려나 대사헌(大司憲)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1637년(인조 15) 이조판서에 승진, 이듬해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를 겸직하였다. 1639년 다시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는데, 앞서 청(淸)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된 왕제(王弟)와 대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보낸 사건으로 파면되었다. 죽은 뒤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문집에 《설사집》이 있다.

역참조항목

채겸길, 송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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