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응운

남응운

[ 南應雲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으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형조 ·병조의 참의,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글씨에 능해 《서화담경덕비》,《황산대첩비》등을 썼다.
출생-사망 1509 ~ 1587
본관 의령
치원
국창 ·난재 ·관원
활동분야 행정, 글씨
주요작품 《서화담경덕비》(개성) 《황산대첩비》(운봉)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치원(致遠), 호는 국창(菊窓)·난재(蘭齋)·관원(灌園)이며 참판 남세건(南世健)의 아들이다. 1535년(중종 3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주서(注書)·강계판관(江界判官)을 지냈다. 1545년(인종 1)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546년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1549년(명종 4) 길주목사(吉州牧使)가 되었다. 1551년 판결사(判決事)·우부승지·참찬관을 역임하였고 1552년(명종 7)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54년 황해도관찰사, 이어 형조·병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1559년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고 그 뒤 경기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공조참판 등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의 중직을 받았다.

글씨를 잘 써 일찍이 서총대(瑞葱臺)의 시예(試藝)에서 문무과(文武科)에 모두 장원하였으며 전서(篆書)·주서(籒書)에 능하였다. 작품으로 개성에 있는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운봉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과천의《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 장단의 《허종신도비(許琮神道碑)》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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