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

김개남

[ 金開男 ]

요약 동학의 태인(전북 정읍) 대접주. 전봉준 다음 가는 남접의 실력자였다. 동학농민운동 때 남원을 점거하여 전라좌도를 통할했다. 타협 끝에 전주성을 내주고 해산했다가 청과 일본이 개입하자 다시 일어나 남원부사를 처단하고 동학군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우금치, 금구 등에서의 패배 끝에 태인에서 체포되어 죽었다.
출생-사망 1853 ~ 1895
활동분야 종교

전봉준(全琫準) 다음가는 남접(南接)의 실력자로,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초기에 태인의 두령 김낙삼(金洛三)·김문행(金文行) 등 1,300여 명을 거느리고 백산(白山)에 집합, 남원을 점거하여 전라좌도(全羅左道)를 통할, 전봉준을 능가할 위세를 떨치며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때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과 타협, 동학도(東學徒)를 박해하지 않을 것을 확약받은 후 전주성(全州城)을 관군에게 내주고 동학농민군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일본 군대가 개입하자 다시 일어나 5∼6만의 병력으로 남원에서 전주로 진격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 이용헌(李龍憲)을 붙잡아 처단하고, 동학군정(東學軍政)을 실시하였다.

이해 10월 하순 전주 수비군 5,000명을 거느리고 공주회전(公州會戰)에 참가하여 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하였다. 그후 직속부대를 거느리고 청주로 진격하였으나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에게 패배하였고, 다시 남하하여 금구(金溝)에서 또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패주하였는데, 12월 27일 태인에서 생포되어 1895년 1월 8일 효수(梟示)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