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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騎射 ]

요약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일.

인류가 활을 사용한 이후 사냥이 쉬워졌으나 빠르게 달아나는 짐승을 걸어가면서 쏘아 맞힐 수는 없었다. 말을 타면서부터는 말을 달리면서 활로 짐승을 쏘았다. 기마민족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騎射)로 사냥을 해서 먹을 것을 얻었고 전쟁도 하였다.

한국의 선인들도 삼국시대에 기사로 사냥을 하였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로서 지금의 중국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무용총(舞踊塚) 주실(主室) 서쪽 벽면의 수렵도를 보면, 말을 달리면서 활 시위를 힘껏 당기는 젊은이들이 사슴·호랑이를 쫓아가고 있다. 평남 용강군에 있는 감신총(龕神塚)의 기사인물상은 모자를 쓴 남자가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자세이다. 이러한 벽화에 나타난 광경은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의 생전의 생활 모습이거나, 또는 장사지낼 때 있었던 일을 표현한 풍속화이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사냥 대회를 열어서 짐승을 많이 잡은, 말 타고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용사(勇士)로 승진시켰고, 신라에서도 8월 보름날에 벼슬아치로 하여금 기사로 겨루게 하여 임금이 상을 주었다. 《북새기략(北塞記略)》의 <공주풍토기(孔州風土記)>에 보면, 일반적으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고, 사내아이가 10여 세가 되면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았다는 기사의 풍습이 전한다. 공주(孔州)는 함북 경흥의 옛 이름이다.

한국 북부의 주민들은 산악지대에 살았었기 때문에, 식생활을 농경에만 의지할 수 없었고 자연히 사냥이 식료 획득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당시 조랑말을 타고 들판을 달리고 산을 오르내리면서 기동성 있는 사냥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사냥은 농경에 밀려서 사냥꾼의 전업이 되거나 귀족의 놀이가 되었다. 고려 공민왕의 작품 《출렵도(出獵圖)》에는 말을 탄 사나이가 활과 화살을 메고 산 속으로 달려가고 있으며, 고려 말기의 학자 이제현(李齊賢)의 《대렵도(大獵圖)》에도 활을 가진 사람들이 말을 타고 산골짜기에 모여 있다. 《대전회통(大典會通)》 <병전(兵典)>에는 시취(試取)에 기사가 있는데, 몸을 구부리고 말을 달려 앞을 향하여 목표물을 쏘되, 화살을 쏜 다음에는 몸을 뒤로 젖히고 손을 들어서 활을 뒤집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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