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

금관

[ 金冠 ]

요약 삼국시대 왕이나 귀족들이 머리에 쓰던 관.
금관의 부분 명칭

금관의 부분 명칭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은 상당수에 이른다.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그 양식도 다르다. 금관은 아니지만 역시 관(冠)에 장식하였던 금관식(金冠飾)도 금관의 범주(範疇)에 넣을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과 왕비의 금관식, 경주 천마총(天馬塚)에서 나온 금제 조익형관식(金製鳥翼形冠飾)과 접형관식(蝶形冠飾) 등이 그것이다.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潘南面) 신촌리(新村里)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金銅冠)도 역시 금관의 범주에 넣어서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경주시 교동(校洞) 고분에서 나온 금관과 고령 고분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는 가야시대(伽倻時代) 고분의 금관과 비슷하다.

나주시의 금동관 외관(外冠)은 동대(銅帶)를 둥글게 꾸부려서 만들었고, 전면과 좌우에 수목형(樹木形) 입식(立飾)을 만들어 세웠으며, 테두리와 입식에 달개[瓔珞]를 달았다. 이 입식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관식의 모양과 일맥상통한다. 내관은 반원형 동판 두 개를 맞붙여 만들었으나 신라 때의 금관처럼 투각장식은 없다. 거기에 인동무늬와 화초무늬를 타점(打點)으로 장식하였다.

고령에서 출토된 금관은 관테[臺輪]라는 테두리 전후 좌우에 초화형(草花形) 입식 4개를 세웠다. 관테와 입식에도 타점으로 장식하였고, 달개[瓔珞]와 곱은옥[曲玉]을 달았다. 초화형 입식은 기하학적인 형이 아니라, 사실적인 선을 단순화해서 만들었다. 나주시 금동관의 입식을 극히 단순화시켰다는 느낌이 든다.

경주시 교동에서 출토된 금관도 관테의 전면과 좌우에 도안화된 수지형(樹枝形) 입식 3개를 세웠다. 관테와 입식에 타점장식이 없고, 달개를 많이 달아 장식했을 뿐이다. 이 단순하게 도안화된 나뭇가지 모양의 입식은 다른 신라 금관의 ‘出’자형 입식의 초보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한국 금관의 대표적인 것은 역시 금관총(金冠塚)·서봉총(瑞鳳塚)·금령총(金鈴塚)·천마총(天馬塚)·황남동(皇南洞) 98호분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이것들은 내관과 외관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관은 금판에다 전면에 걸쳐 여러 무늬를 질서 있게 투각하였고, 타점으로 직선이나 곡선 등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것 2장을 맞붙여서 위가 뾰족한 모양을 만들어 외관의 관테 안에 붙였다. 그 앞의 전면에 투조(透彫)하고, 달개를 단 조익장식(鳥翼裝飾)이 뒤로 비스듬히 솟아오르게 양쪽에 달렸다. 이 내관을 이런 모자 대신에 2개의 양대(梁帶)를 대각선 방향에서 둥글고 높게 달아 머리 위에서 十자로 교차하게 하고 거기에 장식을 단 것도 있다.

내관이 없는 금관도 많다. 외관은 테두리인 관테와 거기에 세우는 입식, 그리고 거기에서 늘어뜨리는 드리개[垂飾]로 구분해서 구성된다. 관테는 금판을 띠 모양으로 오려서 등글게 만들어 머리에 쓰도록 한 것이다. 이것의 정면과 양 옆에는 出자형 입식(立飾)을 붙여 세우고, 후반부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 2개를 세웠다. 이런 모든 것은 주변에 한 줄, 또는 두 줄로 도드라진 점으로 선을 그리거나 장식을 하고, 달개와 곱은옥을 일정한 규격대로 달아서 아름답게 꾸몄다. 관테의 좌우에는 줄이 긴 드리개를 두 줄 늘어뜨린다. 드리개는 속이 빈 금구슬에 심엽형(心葉形) 달개를 여러 개 단 것을, 금쇄환(金鎖豌)으로 연결하고,끝에는 머리 부분을 금으로 장식한 곱은옥을 달아서, 화려함을 더욱 돋우었다. 드리개 2가닥만이 아니라, 더 많은 드리개를 늘어뜨린 금관도 있다. 이마 가운뎃부분만 약간 남겨두고 좌우에 각각 3줄씩 모두 6개의 드리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얼굴 앞으로 늘어지는 4개의 드리개는 짧고, 양쪽 끝의 것이 훨씬 길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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