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타왕조

굽타왕조

[ Gupta dynasty ]

요약 320년부터 550년경까지 북(北)인도를 통일·지배한 왕조.

이 시기는 고전(古典) 인도문화의 최성기에 해당한다. 굽타왕조는 일반적으로 찬드라굽타 1세가 확립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그 성립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3세기 중엽에 쿠샨왕조의 세력이 쇠퇴하여 북동인도가 그 지배에서 벗어난 후 작은 지방지배자가 할거하였을 때, 그들 중에 굽타왕조가 마가다 지방(지금의 비하르州)에서 흥륭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찬드라굽타 1세는 명문가인 리차비와 혼인관계를 맺고 처음으로 ‘대왕(大王) 중의 왕(마하라 지아디라자)’이라 칭하면서 갠지스강 중류지역에 세력을 확장했으나, 북인도 통일의 대업은 스스로 ‘모든 왕의 정복자’라고 호언한 사무드라굽타에게 인계되었다. 이 왕의 정복에 대해서는 알라하바드 석비(石碑)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갠지스강 상류지역의 여러 나라를 정복, 이를 병합하여서 네팔·아삼·남(南)벵골 등의 주변국가를 굴복시켜 조공을 거두었고, 또 데칸으로 진군하여 멀리 칸치(칸치푸람)의 팔라바왕을 굴복시켰다고 한다.

그 뒤를 이어 찬드라굽타 2세는 나가 및 바카타카 왕조와 결탁하여 2세기에 걸쳐서 그자라트와 사우라슈트라를 지배하던 샤카족(族)의 서방 크샤트라파를 쫓아내어 그 지방을 확보하였고, 또한 벵골과 신드를 병합하였다. 이리하여 굽타왕조는 동쪽 벵골로부터 서쪽 사우라슈트라까지와 북쪽 네팔 국경으로부터 나르마다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굽타왕조 본문 이미지 1

그의 아들 쿠마라굽타 1세는 이를 계승하여 1세기 이상에 걸쳐 전성기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쿠마라굽타 1세의 만년부터 굽타왕조의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북서방에서 침입한 에프탈족이 점차로 서부 영역을 잠식하였고, 굽타왕조에 종속해 있던 지방지배자가 세력을 확대하여 독립한 데에 기인한다.

이 쇠퇴를 입증하는 것은 금화(金貨)이다. 즉 로마 황제의 디나르 금화와 같은 중량의 것을 쿠샨왕조가 주조하였고, 다시 굽타왕조도 그것을 본떠서 금화를 주조하여, 그것을 디나라라고 하였다. 쿠마라굽타 1세까지의 3대에 걸쳐 주조된 금화는 그 종류가 많고 다량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량은 120그레인(1 grain=0.064 g)을 중심으로 하여 10 %의 증감이 있었고, 그 후 점차 불어갔다.

그러나 스칸다굽타 이후는 금화의 주조가 급격하게 적어지고, 중량이 144그레인(스바르나 貨)으로 불었으나, 그 이전의 것과 비교하여 금의 함유량이 격감되었다. 스칸다굽타는 옛날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에프탈족을 쳐서 영역 내의 지배에 힘썼으나, 그가 죽은 후의 약 10년간에 세 왕이 교체되어 세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사우라슈트라의 마이트라카왕조, 군데르 칸드의 파리바라자카 ·우차카르파 두 왕조의 지방지배자의 세력이 강대해졌다. 또 서부 영역은 에프탈족에 의하여 잠식되고, 요충지인 에란도 6세기 초에 그 수중에 떨어졌다. 이리하여 6세기 초 굽타왕조는 거의 바라나시(베나레스) 이동(以東)으로 영역이 한정되었고, 이 지방의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이 높아감에 따라 왕자를 지방장관에 임명하는 등 영역의 확보에 진력하였으나, 6세기 중엽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북인도는 여러 지방지배자가 할거하여 통일제국은 붕괴되었다. 7세기 초에 하르샤가 카니야쿠브자(카나우지)를 수도로 정하여 재차 북인도를 통일하였으나, 40년간의 왕의 통치가 종식되자 다시 분열되어 할거의 형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