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주의

국제주의

[ internationalism , 國際主義 ]

요약 근대 국제사회에서 개별국가의 이해를 초월하여 모든 민족·국가간의 협조·연대(連帶)·통일을 지향하는 사상이나 운동.

국제주의는 국가·민족을 전제로 하여 국제적 통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로마 교황의 교권(敎權)으로 뒷받침된 중세 유럽의 유니버설리즘(universalism:보편주의)이나 각 개인을 단위로 하여 세계질서를 구상하는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세계주의)과는 구별된다.

국제주의라는 관념은 14∼15세기경에 나타나 17∼18세기에 크게 제고(提高)되었다. 즉, 중상주의(重商主義) 시대의 모든 국가간의 분쟁이나 전쟁이 국제조직화에의 관심을 환기시켜 유럽 국가체계 내부에서의 국제연맹적 조직·상설의회·국제중재재판·국제군 등의 제 구상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국제주의 사상은 절대군주 상호간의 관계를 기조로 하여 국제질서를 구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어서 정치적 기반도 좁았고, 실효성도 미흡한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J.J.루소, I.칸트, J.벤담 등의 사상에 나타난 국제주의는 구시대의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지녔다. 루소와 칸트는 절대군주의 이성을 신뢰하지 않고 전제(專制)의 타파, 입헌적 개혁을 국제통일의 필요조건으로 본 점에서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구제(救濟)의 이론을 여론에 의하여 창출해 낸 최초의 사상가’로 일컬어지는 벤담은 식민지 해방·비밀외교 폐지·군비철폐·중재재판소 설치 등 여러 안을 제기, 그것들을 여론의 힘과 결부시키려고 생각한 점에서 자유주의적인 국제주의 사상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1815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제창으로 결성된 신성동맹(神聖同盟)은 국제주의와는 이질(異質)의 중세적 보편제국에서 그 원형을 찾고 있었던 것으로도 추찰(推察)될 수 있듯이, 유럽 제국의 변혁을 두려워한 봉건적·반동적인 국제주의의 체제로서, 결과적으로는 부르주아혁명·민족혁명을 저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세기에서의 국제주의의 새로운 두 조류, 즉 부르주아 국제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직접적으로는 이러한 신성동맹에 대한 반항으로서, 후에는 자본의 팽창적 내셔널리즘(nationalism)에 대항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부르주아의 국제주의

19세기 초기의 사조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여론의 계발과 조직화를 추진하면서 국제적 연대의 방향을 추구하였다. 1815년 미국, 1816년 영국에서 발족하여 대륙 제국으로 파급되었다는 ‘평화협회’ 운동에는 평화주의자나 급진적 자유주의자가 참가하여 국제평화와 사회개혁의 요구를 결합하는 경향이 있었다. 1840년대는 당시의 ‘영국적 평화’의 번영에 영향을 받아 통상에 의한 국제적 연대의 증강을 요구하는 자유무역론자의 참가가 주목되었다.   1850년대 이후 배타적 내셔널리즘의 대두로 이 운동이 쇠퇴하였으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대전의 위협이 절박해지자 ‘평화협회’ 등의 운동이 미국·영국·스위스·네덜란드·벨기에 등에서 재생하였다.   특히 미국에서는 당시의 혁신주의 풍조와 ‘미국적 평화’로의 이행기를 배경으로 하여 평화주의자와 집권자와의 제휴가 실현되었다. W.윌슨 대통령의 국제협조주의는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19세기의 앵글로 아메리칸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합리주의적 사상을 20세기의 국제정치에 이식하려고 하였다’고 평가된다.   미국 경제의 대외팽창의 기조와 국제주의적 이데올로기 사이에 어떤 협조가 성립하였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 외교의 이데올로기적 유형을 형성하고 있다는 지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 부르주아 국제주의는 19세기 이래의 평화주의적인 계보(系譜)를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의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체제적인 정치 ·경제의 통합사상으로서도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주의

1830년대에 신성동맹에 대항하여 각국의 민주주의혁명과 민족해방을 꾀하는 피압박 계급의 국제적 연대운동으로 등장하였다. 1864년에는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노동운동의 성장, 민족문제의 격화, 미국 내전에의 개입문제 등에 자극되어 노동자 중의 선진적 분자가 국제적으로 결집한 것이었다.

1889년에 창립된 제2인터내셔널은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구성단위가 되어 반전(反戰)과 자본주의 타도를 중심과제로 하는 국제정치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기본이념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가 민족적 이기주의이고 또한 팽창주의이기 때문에 각국의 노동자 계급은 민족주의의 견지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 연대하지 않는 한 언제나 침략전쟁의 최대 희생자가 된다는 주장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지배는 국제적이기 때문에, 만국 노동자의 해방투쟁은 모든 노동자가 국제자본에 대하여 공동으로 투쟁할 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상호대립적인 동시에 국제적이기도 한 자본의 성격에 대하여 동일 방향성과 유기적 연결성을 가질 때 각국의 노동운동·사회주의운동은 최대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사회주의운동은 내셔널리즘파(사회애국주의파)·소부르주아 국제주의파(중간파)·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파(혁명파)로 분열하였다. 혁명파는 N.레닌의 지도 아래 1919년 창립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로 결집되어 갔다.

코민테른은 단일 사령부를 가진 국제공산주의 정당으로, 각국 공산당은 그 지부라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나 I.V.스탈린 독재하의 코민테른 내에서, 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코민포름의 내부에서 과연 진정한 국제주의 원칙이 관철되었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후 사회주의가 복수화한 시대에서 사회주의 세계 또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확고한 단결’은 특히 50년대 말에 이르러 파탄이 표면화하였다. 그 원인으로는 각국의 민족적 특수성이나 역사적 전통의 차이, 세계공산주의 운동노선의 대립 등이 지적된다. 또 공산주의 제 정당간 또는 사회주의 제 국가간의 대립을 조정하는 통일지침과 상호신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자주독립이라고 하면 분산적으로 되고, 국제적 통일이라고 하면 대국주의의 강요로 될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의 현실은 노동자나 사회주의 국민의 의식 속에서 국제주의가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의미한다.